12월에 합격 발표를 듣고 이듬해인 2020년 9월, 첫 학기를 시작했다. 개강 첫 주, 미네르바 대학 설립자인 벤 넬슨이 이야기한 두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은 의도적이다Everything is intentional.”라는 말이었다. 미네르바의 교과과정은 최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밀하게 설계한 결과물이니, 중간중간 의구심이 들더라도 일단 믿고 따라와 달라는 주문이었다. 두 번째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살짝 섬뜩하기도 했다. 바로 “너희들에게 뇌수술을 해주겠다We will give you a brain surgery.”라는 문장이었다. 1학년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지만 마치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하게 될 것이라는 격려의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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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수업은 20명 이하 규모로 한 시간 반씩 진행되는데, 시작할 때쯤 프렙 폴Preparation poll이라는 지시험을 본다. ‘가설 수립과 연역적 사고방식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가?’ 이런 식의 질문이 하나 등장하고, 그에 대한 본인의 답을 3분 안에 적어야 한다. 사전 리딩을 하지 않으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면 교수의 화면에 학생들 참여도가 표시되고, 말수가 적은 학생들이 수시로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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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학년을 돌이켜보면 학업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사람이다. 미네르바 대학 기숙사에 밤늦게 둘러앉아 나누던 ‘기본소득은 좋은 제도인가’ 하는 이야기, 에티오피아 친구가 들려주던 제국의 마지막 황제 이야기, 에스토니아 친구의 우여곡절 스타트업 도전기. 이렇게 스치듯 나누는 사소한 이야기들이 수업에서 배우는 내용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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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쿨링은 기존 학교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선다. 배움은 교실에서만, 교과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언스쿨링은 온 세상이 학교요,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보든,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관계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다.
--- pp.73-74
아침 영어 공부 시간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진행했는데, 언제나 주역을 담당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나였다. 내가 숙제를 해 오면,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의 열띤 강의가 이어졌다. 우리는 방 벽에 전지를 붙이고 그 위에 비닐을 덧붙여 큼지막한 간이 화이트보드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글자가 끝없이 채워졌다가 다시 지워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 pp.109-110
실제 계좌에 넣을 돈은 없었지만, 일단 모의 투자라도 시작해보자는 생각으로 도서관에 있는 주식 관련 책들을 모조리 빌려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새로운 책들을 신청해야 했다. 당시 파주시 도서관에서는 한 사람당 일주일에 두 권씩 책을 신청할 수 있었는데, 나는 온 가족의 이름으로 일주일에 여덟 권의 책을 새로 신청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도서관에 주식 투자에 관련된 책이 100권도 넘게 비치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사서들이 나에게 이렇게 부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임하영 학생, 이제 주식 관련된 책은 제발 그만 신청해주세요!”
--- p.167
그동안 장난꾸러기 친척 동생과 그 단짝 친구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서 모은 돈, 설날에 받은 용돈, 그리고 통장에 얼마 남지 않은 잔고를 탈탈 털어 비행기 표를 샀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무일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개월. 그때까지 어떻게든 최소한의 경비를 모아야 했다. 감사하게도 친구들, 그리고 지인들이 햄버거라도 사 먹으라며 십시일반 여비를 보태주셨다. 보험을 들고, 배낭을 사고, 옷을 몇 벌 장만한 뒤, 비상금을 통장에 남겨둔 채, 285유로, 한국 돈으로 35만 원가량 되는 현금을 가지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88일간의 유럽 여행이 그렇게 막을 올렸다.
--- pp.260-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