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아, 이제는 그냥 이 고통이 끝났으면 좋겠어. 이제는 더 바랄 게 없어. 그런데 너와 약속한 그 책만은, 꼭 마치고 떠나고 싶었는데.” 내 주변의 사람들 중 가장 철저하게, 고통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 그가, 내게 털어놓았다. 이번 생에 더는 바랄 것이 없으니, 그저 이 아픔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너무 놀라 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결코 이럴 분이 아닌데. 이렇게 다 놓아버릴 분이 아닌데. 참담한 고통이 그 아름다운 영혼의 척추를 부러뜨려버린 것일까.
--- 「책을 시작하며」 중에서
이 책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아주 오랜 ‘우정의 왈츠’다. 내 능력이 닿지 못해, 선생님의 마지막 체력이 허락하지 못해, 그 수많은 우정의 대화들을 미처 다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 선생님의 모든 말씀은 왈츠처럼 우아하고 예의 바르며 기품이 넘쳤다. 뼈아픈 실수를 돌이켜볼 때조차도, 두 눈 질끈 감고 싶은 지독한 상처를 회상할 때조차도, 무시무시하게 어려운 문학작품과 철학이론에 대해 설명해주실 때조차도. 선생님이 그 부리부리한 눈망울과 가냘픈 손가락으로 내게 가르쳐주시던 ‘내가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한 모든 이야기는 위대한 지성의 왈츠였다. 아직 내가 한참 모자란 사람이기에, 차마 왈츠를 대등한 입장에서 출 수는 없었다. 선생님이 능숙하게 리드하고, 나는 선생님의 발을 여러 번 밟으며 멋쩍게 웃는다.
선생님의 발가락은 유난히 얇고 살이 없어서, 내가 형편없는 스텝으로 선생님의 발을 밟을 때마다 으스러지게 아플 것 같지만. 선생님은 나 때문에 황당하셨을 때도, 나 때문에 괴로우셨을 때도, 단 한 번도 나를 야단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아하게, 다만 눈부시게, 그저 ‘다음 왈츠’를 추자고 하셨다. 나를 비난하고 괴롭히면서도 ‘이게 다 널 사랑해서 그래’라는 눈빛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려고 했던 파렴치한 사람들과 달리, 선생님은 절대로 화내지 않는 사랑, 결코 얼굴 붉히지 않는 사랑이 이 세상에 분명 존재함을 온몸으로 가르쳐주셨다. 선생님을 통해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사랑에는 본래 그 어떤 어둠도 없음을. 어둠조차 참아내는 사랑을 강요하는 세상 앞에서, 선생님은 어둠 없는 사랑의 티 없는 모범답안을 보여주셨다.
--- 「프롤로그」 중에서
나는 이제야 안다.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그 모든 어둠의 기억조차도 햇살처럼 환하게 변신시켜버리는, 선생님의 그 무한한 다정함이 진짜 사랑임을. 어리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세상에서 자꾸만 까이고, 무시당하고, 짓밟힐 때도, 선생님은 변함없는 예의바름과 믿을 수 없는 친절함으로 내 모든 슬픔과 분노를 지극히 존중해주셨다. 선생님은 내가 연인에게도 친구에게도 받지 못했던 그 모든 사랑을 한꺼번에 되돌려주시면서도, 그것이 ‘특별히 나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마 선생님의 글을 한 편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선생님의 강의를 한 번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분명 알 것이다. 인간 황광수는 자신에게 불친절한 모든 사람에게, 온힘을 다해 친절하고 다정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였음을.
---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나에게는 세대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나 대화의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십여 년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우리가 우정을 쌓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 보여주셨고, 까마득한 후배인 내가 쓴 글을 매번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격려와 지적도 해주셨다. 나는 선생님의 글과 말을 통해 전후세대의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었고, 선생님은 나의 글과 말을 통해 여성의 시각과 나의 세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 「프롤로그」 중에서
44년생 황광수와 76년생 정여울은 어떻게 이토록 절친한 벗이 되었을까요. 우리 사이엔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우리의 우정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었으니까요. 그저 함께 있기만 해도 좋았으니까. 그저 선생님을 멀리서 그리워하기만 해도 미소가 몽글몽글 피어올랐으니까요.
--- 「여울의 편지 1」 중에서
요즘 나는 노년에 이르러 자연친화적으로 되어가는 것은 그 자체가 ‘자연의 생리’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자연에 대한 나의 느낌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요즘엔 모든 피조물이 슬프게 보일 때가 많아.
--- 「광수의 편지 1」 중에서
살아갈 날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할 텐데, 심신이 괴로우니 고통이 없는 시공간을 상상하게 되나 봐.
--- 「광수의 편지 2」 중에서
돌을 손에 쥐면, 때론 그게 지구의 뼛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해. 무엇보다 지구와 직접 접촉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이 좋아.
--- 「광수의 편지 3」 중에서
다시 한 번 선생님의 단호한 일갈을, 마치 제우스의 번개처럼 제 머리 위로 강력하게 내리꽂히던 그 서릿발 같은 통쾌한 충고를,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듣고 싶어요. 사람들은 충고나 조언을 싫어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충고나 조언을 잘못했다가는 ‘꼰대’ 소리 듣기 딱 좋다고들 걱정하지만, 저는 여전히 지혜로운 충고나 따스한 조언을 절실하게 필요로 해요. 저는 아무리 성장해도 한참 모자란 존재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 「여울의 편지 4」 중에서
햇살이 눈부시다. 우주복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후드 달린 등산복과 무겁고 투박한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지구라는 행성을 처음 탐사하는 우주인처럼 무겁고 느리게 뒷동산을 걸어볼 참이다.
--- 「광수의 편지 4」 중에서
나는 이론이 아니라, 작품과 역사적 현실을 연관 지어서 텍스트를 읽는 데 집중하고 싶었어. 역사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어떤 것이겠지. 그 역사와의 연관성을 서술하는 것이 비평이어야 하지 않을까.
--- 「인터뷰_황광수」 중에서
민주주의는 현실 자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지향해야 할 이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 「인터뷰_정여울」 중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 위해 삶을 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들이 해야 할 일도 바로 그거라고 생각해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주는 것이지.
--- 「인터뷰_황광수」 중에서
사람들은 지혜로운 노년을 말하는데,
나는 왜, 그토록 많은 것을 온축한 노년이어야 마땅한 시기에
빗나간 욕망, 헐벗은 습관에 외곬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 「에세이」 중에서
나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까마득히 창공으로 치솟아오를 때의 아슬아슬한 느낌, 파도 타는 자의 아슬아슬한 느낌을 음악처럼 즐겨야 한다. 파도를 타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서퍼들처럼, 중심은 단단하되 가볍게 날아오르는 글을 쓰고 싶다.
--- 「에세이」 중에서
“선생님, 혹시 백 년 전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 가려면 어떻게 갔을까요?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요? 힘들기는 하지만 우리는 가두리 양식장 같은 비행기에 갇혀 열 시간 정도만 버티면 유럽에 도착하는데, 백 년 전 사람들은 어떻게 미국에 갔을까요?”
“글쎄다, 넌 알아?”
또 내가 잘난 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선생님, 그게요, 일단 기차를 타야 해요. 남대문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거죠. 거기서 배를 타고 일본 오사카로 가요. 그다음에 오사카에서 요코하마로 가는 거죠. 여기서 미국 태평양회사의 증기선을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요.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데 약 삼 주일 정도 시간이 걸려요. 정말 힘들게 가죠?”
“승원이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선생님, 제가 문학박사잖아요. 하하하.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에서 주인공 옥련이가 미국에 갈 때 그렇게 가요. 그 소설에 보면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약 삼 주일 걸린다는 내용도 나오고요.”
“맞아, 우리 승원이가 문학박사였지. 하하하.”
선생님과 나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과 정 작가는 문학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고, 나는 언제나 문학의 본질이 아닌 문학의 ‘언저리’만을 이야기했다. 언제가 술자리에서 선생님과 정 작가는 내가 지은 필명을 듣고 크게 웃었다. 문학을 전공했지만 매번 문학의 언저리만 이야기해서 제 필명을 ‘언저Lee’로 짓겠다고.
--- 「황광수 선생님을 추억하며」 중에서
선생님, 그곳은 많이 춥지 않으신가요. 선생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는데, 그 차가운 관 안에 선생님을 홀로 내버려두고 돌아서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마스크를 쓴 제 양 볼 안쪽으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이 상실은, 이 결핍은 결코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겠지요. 선생님이 한없이 낯선 존재인 저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셨듯이, 제가 먼저 사람들을 이해하고, 돌보고, 보살피겠습니다. 그들이 저를 꼰대라 놀려댈지라도, 그들이 저를 재미없다고 면박을 줄 지라도, 제가 먼저 사랑하고, 제가 먼저 다가가고, 제가 먼저 보듬어 안을게요.
선생님, 이제 고통 없는 곳에서, 굶주림도 슬픔도 원한도 없는 곳에서, 부디 향기로운 꿈을 꾸며 저를 기다려주세요. 제 몫의 사랑과 배움과 노동을 다 마치고, 저도 언젠가 그곳에 가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제 지친 어깨를 꼭 안아주실 선생님을 생각하며, 오늘의 이 슬픔을, 오늘의 이 고통을 꿋꿋하게 견뎌낼게요.
--- 「여울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그리하여 나는 이제 이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별 따위, 작별이나 놓아버림 같은, 그런 무정한 것들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이에 가능한 그 어떤 이별도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님의 그 그렁그렁한 눈빛. 첼로처럼 낮지도 않고 바이올린처럼 높지도 않은, 딱 비올라처럼 미묘하게 적당한 높낮이로 오르내리는 감미로운 목소리.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일단 눈썹을 먼저 양 손가락으로 싹 쓸어올리고 양팔의 소매를 매만진 다음, 술상을 한 번 꼭 붙드는, 그 익살스러운 몸짓.
내가 신문에 글을 쓸 때마다, 아침 일곱 시쯤에 디지털도 아닌 종이신문으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읽어내신 다음, 부리나케 아름다운 감상평을 쓰셔서 긴 문자 데이터 메시지로 보내주시는 그 정성스러움. 내가 아마존 킨들로 전자책 사보는 법을 가르쳐드렸더니, 한 달 만에 영어로 된 전자책을 수백 권 구입해버리신, 그 무시무시한 학구열. “이제 돈도 데이터도 남아있질 않네.” 너털웃음을 지으시던 그 푸근함.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영어소설이나 독어책을 늘 끼고 다니시며 내게 그 아름다운 문장을 직접 번역하셔서 들려주시던 경이로운 문장력과 놀라운 외국어 실력. “선생님, 전 불어 못하잖아요, 이걸 어떻게 읽을까요.” 엉엉 우는 소리를 하는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불어판을 선물해주시며, 언젠간 꼭 읽을 거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을 쏴주시는 그 잔뜩 기대감 부푼 얼굴. 이승원 선생님과 함께 우리 세 사람이 무려 두 달간이나 취재차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무려 사 킬로그램이나 빠지셨으면서도 단 하루도 흐트러지거나 힘겨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 초인적인 꼿꼿함.
그 모든 찬란한 황광수 특집 퍼레이드를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는 그 끔찍한 날이 오더라도, 우리 사이에는 ‘이토록 영원히 무지한 사랑’이 눈부시게 가로놓여 있다. 내 사랑은 무지하다. 그래서 비로소 완전하다. 내 사랑은 계산도 분석도 예측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토록 덜떨어진 사랑과 선생님의 그토록 완전한 사랑은 놀랍게도 완벽한 조합을 이루어, 이토록 눈부신 ‘마지막 왈츠’를 추고 있으니까.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왈츠를 추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절대로 화내지 않는 사랑, 결코 서운하게 만들지 않는 사랑, 단 한 번도 배신하지 않는 사랑의 힘을.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