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과 창조력을 지닌 기술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이에 비등하게 존재의 가벼움과 불확실성, 혼돈에 휩싸여 있다. 끊임없는 문화 교류와 비판적 사고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오랜 세월 내려온 전통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신념 없이는 살수가 없고, 과학으로는 신념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 부상한 이후로 우리가 의지하게 된 신화가 거부한 신화보다 더 세련되고 완전했던가?
--- p.54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에 충실하다. 이게 날 잡아먹을까? 내가 이걸 먹을 수 있을까? 이게 나를 쫓아올까? 내가 이것을 쫓아가야 할까? 이게 짝짓기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객관적 현실’을 모형화할 수 있고, 이런 모형화가 유용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의미’를 모형화해야 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 (이야기 형식을 띤) 의미의 지도는 우리가 그린 이상과 비교하여 현실의 가치를 보여주고, 더불어 원하는 대상을 얻기 위한 실용적인 방법, 즉 행동 방안을 알려 준다.
현 상태, 이상적 미래상, 현 상태를 이상적 미래로 바꾸기 위한 방안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설명하는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이야기를 엮어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이야기는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행동 양식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 준다. 우리는 지금 A지점에 있다는 전제하 에 B지점으로 갈 수 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계획할 수 없기 때문이다. B지점이 최종 목표라는 사실은 B 지점의 가치가 A지점의 가치보다 높다는 뜻이다. B지점은 현재 위치와 비교했을 때 더 이상적인 지점이다. B지점이 현재보다 더 낫다는 인식 때문에 지도에는 정서적 가치, 곧 의미가 부여된다. B지점과 같은 가상의 목표를 만들고 그것을 현재와 비교하는 능력 덕분에 인간은 인지 체계를 활용하여 정서 반응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
--- p.74
약간 과장하면 우리는 미지의 세계를 갑자기 마주하지 않기 위해, 적어도 '의도치 않게' 마주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명인으로서 우리는 안정감을 누린다. (타인이 우리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전제하에) 타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위협이나 처벌 가능성을 최소화하도록 환경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예측과 통제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쌓여서 문화를 이룩한 결과로 가능해졌다. 하지만 바로 이 문화가 우리 눈을 가려 우리는 자신의 정서적 실체를, 그 범위가 얼마나 넓고 그 결과가 얼마나 극적인지를 알지 못한다.
--- p.129
이 신비롭고도 불합리해 보이는 ‘희생 제의’는 실제로 서로 연관된 두 가지 핵심 사상을 극의 형식으로 실연한다. 첫째, 인간의 본질(신성한 측면)은 끊임없이 미지에 ‘제물로 바쳐져야’ 하며 미지의 화신인 위대한 어머니의 파괴적이며 창조적인 힘 앞에 자발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가장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고 희생할 때만 미지의 긍정적 측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첫 번째 사상은 새로운 정보가 생성되고 새로운 행동 양식이 구축되려면 미지를 자발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번째 사상은 부적절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실효성이 없는 것(예를 들어 부적절한 행동 양식이나 신념)에 대한 집착이 적응을 방해하면 세계를 황무지로 뒤바꿔 놓는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부적절한 가치를 지닌 사물’에 집착하는 행위는 곧 ‘병든 가치 체계’(죽은 신)의 지배를 받고 영웅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 p.318~319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일부만 존재하는 듯 행동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무시당한 요소들은 억압을 받아도 반드시 고개를 내민다. 그것도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신화에 대한 지식을 갖추면 이데올로기에 쉽게 속지 않게 된다. 진정한 신화는 어느 상황에나 존재하는 여러 모순된 측면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 긍정적 측면의 이면에는 반드시 ‘적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자애로운 측면은, 살아 있는 존재에 무작위로 고통과 죽음을 선사하는 무시무시한 측면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한다. 또 개인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회의 힘은, 변질되어 다양성을 억압하는 사회의 보수성에 비춰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영웅적 면모 역시 그 속에 도사린 교만하고 비겁하고 잔인한 적수의 면모를 고려해서 바라봐야 한다.
이처럼 ‘현실 세계의 구성 요소’를 빠짐없이 설명하는 이야기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안정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사회적 병폐도 훨씬 적게 일으킨다. 하지만 행동의 장으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끊임없이 대립하고 전쟁을 벌인다. 이처럼 상충하는 요소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서도 그 속에서 파멸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개인, 사회, 혼돈’ 사이의 관계를 발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 세력들 간의 적절한 상호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
--- p.400~401
인간적 한계의 핵심은 고통이 아니라 실존 그 자체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한계의 무게를 짊어질 만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외면하고 타락하는 까닭은 스스로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생에 필요한 존재의 비극적 조건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인생을 진정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만드는 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지진이나 홍수나 암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를 견뎌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고결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인생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타락시키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뒤흔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안기는 무의미한 고통, 우리 자신의 악이다. 그렇다면 악을 저지르는 능력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 p.495
대개 거짓된 사람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다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한다(물론 적극적인 죄를 범하기도 한다). 이들은 탐험을 하고 기존 지식을 쇄신하는 데 일부러 실패한다. 경험 세계에 변칙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저 현재의 행동과 평가 기준을 제시하는 목표 지향 도식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 오류가 정확히 어디서 무슨 이유로 발생했는지, 의미가 무엇인지는 발생한 변칙을 분석하는 첫 단계에서는 ‘가설’에 해당할 뿐이다.
변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하려면 변칙의 구체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공을 들여서 순전한 정서 정보로부터 행동과 신념, 더 나아가 정신과 인격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변칙을 경험하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은 거짓을 일삼는 가장 단순하고 흔한 방법이다.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잠시나마 자신이 범한 오류에 깃든 위험을 감출 수 있다. 이처럼 창조적 탐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절차 및 서술 기억을 구태여 쇄신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듯이 현재에 적응하며, 새로이 생각해 보기를 거부한다. 오류를 바로잡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질서와 혼돈을 중재하려면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한다.
--- p.601~602
의미는 본능이 가장 심오하게 발현된 것이다. 인간은 미지에 끌리고, 미지를 정복하는 데 익숙한 존재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의미를 감지하는 본능은 미지와 어느 정도로 접촉할지를 조절한다. 미지를 너무 많이 접하면 변화는 혼돈으로 뒤바뀐다. 반대로 너무 적게 접하면 정체되고 퇴보한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적절히 이루는 사람은 강인한 인격을 갖추게 된다. 인생을 견뎌 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연과 사회에 적절히 대처할 적응력을 갖추고, 영웅적 이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개성을 견지할 용기만 있다면 제각기 다른 길에서 의미를 찾는다. 개인의 다양한 개성이 발현되고 이것이 사회에 전할 수 있는 지식으로 바뀌면, 역사의 향방이 바뀌고 전 인류가 미지의 영토에 더 깊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 인생의 한계를 설정하는 사회적, 생물학적 조건이 있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심을 한결같이 좇을 줄 아는 사람은 자기만의 적절한 수단을 손에 넣어 한계를 초월한다. 의미는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본능이다. 의미를 저버리면 각자의 개성은 구원의 능력을 잃는다. 최악의 거짓말은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의미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의미를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생에 대한 증오와 파괴에 대한 욕망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 p.871~872
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 생각이 너무 광범위해서 한 번에 명확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을 글로 전부 써 내려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논리적인 언어로 전달하려고 하는 지식은 대부분 지금까지 합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늘 미술과 음악과 종교와 전통을 매개로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전수되어 왔던 것이어서 마치 하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다른 언어가 아니라 전혀 다른 경험의 방식입니다.
--- p.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