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Warum es die Welt nicht gibt』와 『나는 뇌가 아니다Ich ist nicht Gehirn』를 포함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 첫 문장
이 책으로 마무리될 3부작을 통해 대학 사회 너머의 대중에게 그 개요가 소개된 신실재론(새로운 리얼리즘Neuer Realismus)은 근본적인 사유 오류들의 극복을 위한 나의 제안이다.
--- p.13
책의 주요 주장은 우리의 생각이 시각, 청각, 촉각, 미각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감각Sinn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면서 모종의 실재를 더듬는데, 그 실재는 궁극적으로 오직 생각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색깔이 오직 시각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고, 소리가 오직 청각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 p.15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를 의지(意志)하는 동물이다. 무슨 말이냐면, 언제부턴가 인간은 자기가 과연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숙고하기 시작했다.
--- p.21
우리의 인간상과 우리의 가치들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도덕적 가치는 인간 행동을 위한 기준선이다.
--- p.21
인간이란 누구 혹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심층적인 불확실성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치 시스템을 제대로 안정화할 수 없다. 그러면 인간과 더불어 윤리학도 위험에 처한다.
--- p.22
정신이란 〈인간은 누구인가〉에 관한 표상에 비추어 삶을 꾸려 가는 능력이다.
--- p.23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개념은 위험에 처했다. 디지털 시대는 한때 인간의 특권이었던 지능적인 방식의 문제 해결이 많은 분야에서 기계들에 의해 더 잘 수행되는 상황을 빚어 낸다. 하지만 그 기계들은 인간이 삶과 생존을 단순화하기 위해 제작한 것들이다.
--- p.23~24
다른 한편으로 나는 우리 인간의 지능 자체가 인공지능의 한 사례라고 주장할 것이다. 인간의 생각하기는, 태양에서 일어나는 과정들이나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운동, 우주의 팽창, 모래 폭풍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졌으며 정신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과정이 아니다. 정신적 측면을 지닌 모든 것은 인간이라는 생물에 의해 산출된다.
--- p.25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유일신이나 신들이나 우주가 정한 어떤 규범을 지적함으로써 확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답은 오로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규정함으로써만 확립된다.
--- p.34
생각이라는 감각이 반성과 언어를 통해 유난히 발달한 정신적 생물로서 우리 인간은 무한히 많은 정신적 실재들과 접촉한다.
--- p.35
실재가 환상이라는 이 환상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외면하게 만든다.
--- p.36
오히려 우리는 실재의 일부이며, 우리의 감각들은 우리 자신인 실재하는 놈과 우리 자신이 아닌 실재하는 놈 사이의 접촉을 이뤄 내는 매체다. 이 매체들에 대하여 독립적인 어떤 실재가 있고, 이 매체들이 그 실재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매체들 자체가 실재하는 놈, 바로 인터페이스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도 다른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그 정체가 인터페이스다.
--- p.40
인공지능 시스템들은 실제로 인류가 직면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들은 그것들을 창조한 인간들의 가치 시스템을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추천하면서 그 추천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는 하나의 윤리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그림을 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인공 실재를 프로그래밍한다. 그 인공 실재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알아볼 수 있다고들 하는, 가치 중립적으로 계산된 패턴들의 형태로 등장한다. 그러나 아무도 캐묻지 않는 패턴은 아무리 많은 데이터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 p.171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각하기의 복제본이 아니다. 오히려 인공지능은 사유 모형이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받는 시간적 압박과 유한한 생물로서 우리의 필요들을 배제한 채로 우리의 생각하기를 모방하는 논리적 지도다. 유한한 생물인 우리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우리의 이해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몸을 보유하지 않았다면 생각하기 능력을 아예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 p.217
온라인 사회관계망은 한마디로 역할담당자화 기계Personalisierungsmaschine다. 역할담당자화 기계란, 자기 연출의 실현과 상품화를 위한 수단의 구실을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우리가 트위터 계정이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상품화한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타인들이 우리의 자화상을 판매하여 경제적 이익을 챙긴다는 사실이다.
--- p.271~272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추상적인 문제 해결 공간 안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생존의 틀 안에서 불거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에게는 생존이 걸린 질문들이 없다. 왜냐하면 컴퓨터 프로그램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 p.287
오늘날 인공지능으로 불리는 놈은 실은 2차 인공지능이다. 이를 인공인공지능 논제라고 부르자. 인공인공지능은 사유 복제본이 아니라 사유 모형이다. 그 모형은 우리가 개발한 것이다. 그 모형은 인간의 제작물이며, 인간 자신의 지능도 제작물이다.
--- p.468
반대로 우리가 희극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권을 온전히 보유하고 자기 결정을 실행할 수 있는 지위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보편적인 인간성의 핵심이 존재한다는 통찰에 이르러야 한다. 그 핵심은 한낱 동물에 불과하지 않으려는 바람이다. 이 바람이 우리를 비물질적 실재와 연결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 비물질적 실재를 기술 권력으로 뻔뻔하게 착취한다. 이 착취가 아주 잘 이루어지는 것은, 실은 극복된 19세기의 유물론적 세계상이 우리의 사유 장치에 여전히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 p.477
어느 정도 격정적인 마무리를 위하여 나는 조건 없는 보편주의의 나팔을 힘차게 불고 싶다. 보편적인 인간 본질의 핵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를 규정하는 능력이다. 인간의 자기규정 능력은, 우리는 동물이 아니기를 의지하는 동물이라는, 우리의 ─ 병을 일으키는 ─ 자기정의로 표출된다. 모든 인간들은 공유된 ─ 생각감각을 비롯한 ─ 감각들에 기초하여 근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실재를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누군가로 살면 어떠할지 상상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이 도덕의 원천이다. 나의 행위는 내가 타인일 수도 있음을 알면서 실행할 때, 바꿔 말해 내가 가하는 행위가 나 자신에게 가해질 수도 있음을 알면서 실행할 때, 도덕적으로 유의미하다.
--- p.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