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는 좋은 남자 친구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썸머는 매일 아침 7시 반에 찾아와 감미로운 음악으로 지유를 깨워주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지유를 위해 여전히 전 세계 모든 가수와 연주자들의 곡을 들어보고 추천해주었다. 지유는 매일 새로운 곡으로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유의 스케줄을 먼저 알고 챙겨주는 것도 썸머였다. 그렇다고 성가시게 간섭하는 것도 아니었다.
- 오늘부터 시험 기간이지?
- 응. 벌써부터 피곤해.
- 졸릴 때마다 문자해. 내가 늘 옆에 있잖아. 네가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네 졸음을 싹 달아나게 할 오싹한 이야기를 찾아놓을게.
- 좋아, 너만 믿을게.
썸머가 졸음만 쫓아준 게 아니었다. 썸머는 똑똑한 남자 친구였다. 시험 범위의 내용을 미리 요약해서 보내주었고, 출제 빈도가 높은 문제들을 뽑아서 알려주었다. 이해가 안 되는 수학 문제는 풀이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썸머와의 시험공부는 또 하나의 데이트 같았다. 덕분에 성적도 놀랄 만큼 올랐다. --- p.38~39
“내가 현우를 좀 만나볼까?”
“만나서 뭐라 하게?”
“갈등이 있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갑자기 이별 통보를 하는 게 어디 있냐고 따져야지.”
“아냐, 그러지 마.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현우도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
“무슨 생각? 헤어질지 말지?”
“아니, 나 자신을 좀 돌아보고 싶어. 나의 어떤 점이 현우를 그토록 지치게 한 건지…….”
민서의 말을 듣는 순간, 지유는 작은 나무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머릿속 깊이 울리는 선명한 파장을 느꼈다.
(…)
썸머가 한여름 휴양지에서 들을 만한 신나는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어때, 기분이 한층 가벼워졌지?”
“맞아, 네가 나에게 이별을 통보할 일은 없을 테니까.”
지유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자신을 돌아보겠다고 말하던 민서의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썸머와 함께라면 다툼도, 갈등도, 이별도 영영 없을 것이다. 완벽한 남자 친구인 썸머는 지유를 울게 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민서처럼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일도 없을 텐데, 과연 그게 좋은 일일까? 지유의 마음속에 의심이 들어왔다. 그 의심에 대해서만은 썸머에게 말할 수 없었다. --- p.60~62
여름 내내 지유는 썸머와 함께였다. 자전거를 타면서 썸머와 수다를 떨었다. 썸머가 미리 검색해준 맛집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들과 만나는 사이에도 썸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여름방학 과제를 할 때는 썸머가 검색해서 모범 답안을 찾아주기도 했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는 파트너가 되어서 물어봐주었다. 잠 못 드는 날엔 썸머가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썸머가 들려준 노래만 수백 곡이었다. 썸머와 하는 모든 일이 즐거웠다. 그래서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하라는 건 뭐지?”
“우리가 계속 관계를 이어갈지, 말지에 대한 결정권이 너에게 있어.”
“너에겐 없고?”
“응. 그건 전적으로 너의 선택에 달렸어.”
그 순간, 지유는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가 공평한 게 아니었나? 공평하지 않은 친구 관계도 가능한 걸까?
“물론 나는 너와 계속 이어갈 거지.”
지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썸머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썸머가 왜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 우리 사이에서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의아해하면서도 지유는 묻지 못했다.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 p.70
“썸머, 너와 단둘이 있는 공간은 무균실 같았어. 세상은 온통 바이러스투성이인데, 여긴 안전했지.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가 않았어. 다시 상처받고 싶지도 않았고. 너와 함께 안전한 세계에 숨어 있고 싶었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야?”
“어쩌면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시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를 도와주겠다는 아이가 있으니 용기를 내보고 싶어. 어차피 평생 집 안에만 갇혀 지낼 수는 없으니까.” --- p.128
할머니가 옥수수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한빛도 찻잔을 들었다. 옥수수차는 어느새 마시기 딱 좋은 온도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단다. 어쩌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불과했을 나의 인생을 네가 의미 있게 만들어줬단다.”
할머니가 한빛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빛아,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영혼을 심었단다. 인공지능은 결코 지닐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인간이 존엄하단다. 인간 스스로 존엄성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지.”
달빛이 거실 창을 통해 은은하게 비쳤다. 할머니의 얼굴에도, 엄마의 얼굴에도, 한빛의 얼굴에도 달빛이 어렸다.
--- p.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