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아가면서 종종 그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볼이 빨갛고 내성적인 누군가의 빈틈을 알아보게 해준, 얼굴 까맣고 내성적인 다른 누군가의 동일한 빈틈.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비록 학생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 모델이나 근사한 멘토가 되어주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지닌 모종의 빈틈 덕분에 타인의 그것을 세심하게 알아차리고 보듬어줄 수는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싱그럽고 화사하고 당찬 젊음의 틈새에 숨어든, ‘수줍어 인사 못하고’, ‘소심해서 예의 없는’ 몇 안 되는 얼굴들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다독일 것이라고. “내가 너야. 그래서 나는 알아본단다”라며 말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선의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거나 선함의 효용을 설파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어떤 찰나들을 포착하고 기록하여,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나의 결점을 통해 타인의 빈틈을 알아보고 다정한 이해의 눈길을 보냈던 저 순간과 같은. 그런 알아봄의 경험은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바꾸는 데 하등 쓸모를 갖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서로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는 가장 작은 방법이 되어줄 순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채 그럼에도 매일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별것 아닌 것들일지 모른다.
---「프롤로그」중에서
수년 전, ‘세상 읽기’라는 화두로 글쓰기를 제안받고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엉뚱하게도 이 기억이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리하게 분석한 정치 경제적 현안들과 ‘세상을 바꾸는 방안’에 나의 서툰 논평을 한 줄 더 얹는 대신, 그 세상에서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에 시선을 두면 어떨까 생각했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적폐청산을 하고 나쁜 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도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될, 제도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세계. 그 안에서 힘겨워할 우리가 서로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찰나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중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며 밥 벌어먹게 되기까지, 돌이켜보면 먹고살 길이 실제로 끊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막연한 배짱 같은 것을 가졌더랬다. 나 하나 건사할 길은 어떻게든 계속 열리겠지, 하는. 그렇게 열어준 것은 세상 너머로부터의 자비로운 손길이었겠지만, 이는 이 땅 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호의를 경유하여 비로소 일용할 양식의 형태로 내 손에 쥐어졌다. 영화 속 소녀가 ‘아버지 나라’에 다다를 것이 설령 준비되어 있던 선물이라 할지라도, 그곳으로 가는 여정에서 지친 몸을 잠시 의자에 누이도록 해준 것은 특별히 선하거나 자비롭지 않은 한 인간이 건넨, 별것 아닌 호의였던 것처럼.
---「은혜 갚은 까치의 시점에서」중에서
위로든 조언이든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한마디라도 부주의하게 내뱉었다간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아진 그 학생의 마음에 쨍그랑 금이 갈까 봐 두려웠다. (...) 고르고 다듬던 조언의 문장들을 버렸다. 대신 밤늦게 불쑥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 학생에게 “고마워”라고 답했다. 어쩌면 나는 너한테 필요한 조언을 다 못 해줄 테지만, 그런 내게 네 이야기를 들려주어 참말로 고맙다고. 나는 네게 좋은 상담자가 되어주지 못한 걸 미안해하지 않을 테니 너 또한 내게 한밤에 찾아온 걸 미안해하지 않기로 하자고. 네가 말함으로써 조금이나마 후련해진 만큼 나 역시 ‘듣는 귀’가 되어주어 기쁘다고.
---「듣는 귀가 되어주는 것」중에서
물리적 거리 두기에 수반될 관계적 거리를 우려하는 게 사치일 만큼 많은 이의 삶이 무너져 내렸다. 생계 기반을 잃은 누군가의, 자신을 갈아 넣는 근로 조건에 갇힌 누군가의, 자가 격리가 가능한 최소한의 주거 여건조차 갖추지 못한 누군가의 그림자는 언제고 계속 일어설 것이다. 전문가들이 내놓는 분석과 전망에 서툰 한 줄을 보태지 못하겠다. 그럴듯한 인문학적 위로도 못 건 네겠다. 다만 귤 몇 개와 치즈빵 한 덩이를 나누어 가졌던 그 오후를 떠올려본다. 성냥팔이소녀가 켠 성냥처럼 지속 가능하지 못한 찰나적 온기에 불과할지언정 별것 아닌 순간들의 온기가 우리의 매일에 ‘하나 더’ 주어지면 좋겠다.
---「귤 몇 개와 치즈빵 한 덩이」중에서
선량한 이웃이 무심코 던진 말과 시선에 상처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손을 보태고 싶었다. 그게 더 옳아서가 아니라 단지 내겐 그게 더 절실하게 여겨져서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쉽사리 나의 힘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연민 없는 분노가 넘실거리고 예의 잃은 정의감이 너무 자주 목도되는 지금 이곳에서.
---「분노는 나의 힘이 아니기를」중에서
문제의 원인을 치열하게 파고들어 투쟁해야 할 사안에서 약자를 동정하는 데 그치게 만드는 ‘분노 없는 연민’은, 문제의 원인으로 악인을 지목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손쉽게 정의감을 얻는 ‘연민 없는 분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룰 것이다. 그럼에도 난 이 ‘미담’에 냉소할 수 없었다. 선의가 하나 더해진 세상이 그것마저 제해진 세상에 비해 그 크기만큼은 나을 거라 생각해서다. (...) 찰나의 선의는 그 자체로 귀하며,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
---「찰나의 선의」중에서
어두운 터널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깨닫는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 그 터널이야말로 찬란했음을. 그리움에 사로잡혀 뒤돌아보던 우리 머리 위로 반짝이는 순간들이 하늘의 별처럼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이 역시 훗날 또 다른 그리움으로 남을 것임을. 나는 안다. 끝이라 생각해온 어느 지점은 끝이 아니다. 거기에 빛나는 것들이 새로이 채워 넣어질 것이다. 두근거리며 기다릴 무엇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을 것만 같은 시기에도 우린 저마다 아름다운 시절을 하나 더 통과하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오늘도 그럴지 모른다.
---「하나 더 통과하는 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