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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큰글자도서)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 (큰글자도서)

: 마흔 백수 손자의 97살 할머니 관찰 보고서

큰글자도서라이브러리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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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169*254mm
ISBN13 9791160406924
ISBN10 11604069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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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늙는다. 우리는 모두 그들처럼 된다. 노인이 되면 젊어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들이닥치는데, 이 고통은 전 세계 공통이다. 외로움, 생계 곤란, 건강 악화, 배우자와의 사별, 자식 문제, 시대 변화 부적응 등등. 피 여사는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노후를 맞았다.
--- p.15

나는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피 여사라고 불렀다. 처음엔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피 여사는 어느새 “피 여사”라고 부르면 “왜?” 라고 답했다. 나는 어머니도 “박 여사”라고 불렀다.
--- p.22

어느 날, 피 여사가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여명의 새벽녘에 아흔을 넘긴 노파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구슬프게 흐느꼈다. 피 여사는 자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먹이면서 오열하고 있었다.
피 여사의 주변으로 슬픔의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글픔과 서러움으로 뒤엉킨 어둠이었다. 어둠을 걷어내려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설프게 손을 내미는 건 오히려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 같았다. 피 여사가 충분히 울도록 그저 바라보았다.
--- p.49

“이게 이탈리아 음식이니, 피 여사는 이제 이탈리아 할머니가 된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한국 사람이지.”
“지금 먹은 이탈리아 음식 이름이 뭐라고 했죠?”
“몰라.”
“피 여사가 아프면 허리랑 어깨에 붙이는 파스 있잖아요? 파스가 불에 탔어요. 그럼 뭐예요?”
“음, 몰라.”
“파스타.”
“파스타?”
“이게 뭐라고요?”
“파스타.”
--- p.78

피 여사는 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불만이 많았다. 박 여사 앞에서는 뭐라고 하지 못한 채 눈치를 보다가다 나와 단 둘이 있을 땐 불평을 했다. 피 여사의 말에 따르면, 아픈 애미를 놔두고 만날 밖으로 돌아다니는 딸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때로는 격분이 일어나 딸의 면전에서 성토하기도 했다. 물론 피 여사는 박 여사와 있을 때면 나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을 토로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흉보는 건 인간의 본능 같았다.
--- p.103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일본은 패망으로 가고 있었고 막판에 발악하듯 수많은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을 전장으로 끌고 갔다. 사태가 더 심각해지면 피복 공장 직공도 정신대에 갈 수 있다는 우려에 피 여사는 서둘러 시집을 갔다. 피영숙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 p.123

피 여사는 시집을 오자마자 겪은 처참한 상황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어난 일들을 평생 잊지 못했다. 최근의 일들은 좀처럼 기억하지 못했지만 스무 살에 겪은 결혼 생활은 단 하나도 잊지 못했다.
--- p.130

피 여사는 언니와 남동생에게 전화해서 몸은 어떠냐고 안부를 묻곤 했었다. 통화를 마친 뒤에 피 여사는 내게 큰집에 전화하라고 채근했다. 아버지 쪽 친척들과 왕래가 없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는 왜 전화를 해야 하느냐면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피 여사가 하라고 응수했다. 피 여사는 "네 핏줄인데 왜 내가 전화하느냐"라면서 맞불을 놓았다. 내가 되바라지게 피 여사의 사돈이니 사돈에게 전화 좀 하라고 대거리하면 "저놈의 새끼가 말도 안 되는 걸 우긴다"라고 신물을 냈다. 피 여사가 전화 좀 하라고 독촉할 때는 첫째 아들이 생각날 때라고 나는 미루어 짐작했다.
--- p.199

피 여사가 더 이상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위험신호였다. 자신을 함부로 방치하는 사람이 건강할 수 없었다.
"피 여사, 요즘 피부가 꺼끌꺼끌해진 것 같아요. 고왔던 예전으로 되돌아가야죠."
"내가 이 나이에 피부가 고와지면 뭐 하냐."
"피부가 고우면 좋잖아요."
"이렇게 누워만 있는데 피부가 고우면 뭐가 좋아."
"사람들이 피부에 감탄했었잖아요."
"귀찮아. 다 귀찮아."
피 여사는 천천히, 하지만 뚜렷하게 쇠약해졌다. 급기야 다시 병원 신세를 졌다. 피 여사는 몸 여기저기에서 탈이 났다. 자연스레 박 여사와 내가 병실을 지키는 일이 늘어났다.
--- p.233~235

나는 피 여사를 돌보면서 가상 사회관계망을 들여다봤다. 여러 사람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사진과 영상을 올렸다. 나는 그들을 구경했다. 그들과 나는 핏줄을 보듬고 보살핀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다만 그들이 돌보는 아기들은 슬슬 기어 다니다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기쁨을 주었다면, 내가 돌보는 늙은 아기는 걷기는커녕 기어 다닐 수도 없어서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놀라울 만큼 빨리 성장했다면, 피 여사는 하루하루 느리게 쇠잔해졌다. 육아가 성장하는 아이의 푸르른 미래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노인 돌봄은 암울한 미래의 죽음을 늦추는 일이었다.
--- p.272

"피 여사, 지금 행복해요?"
"몸뚱이가 이래서 어디 나돌아 다니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행복하냐?"
"음, 그럼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어요?"
"없어. 행복도 모르고 기쁨도 모르고 살았어."
피 여사는 한평생 행복했던 순간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피 여사에게 막연하게나마 뭔가를 기대하고 물었던 나는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피 여사를 바라봤다.
--- p.284~285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병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보루네오."
뜬금없이 피 여사는 보루네오라고 답했다. 과거에 각인된 가구 브랜드 보루네오가 코로나와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았다. 내가 다시 물으면 피 여사는 스리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전염병 이름이 뭐라고요? 맞춰봐요. 코로 시작해요."
"코, 코, 코브라."
피 여사의 답에 웃지 않고는 못 배겼다. 코로나19로 우울할 때, 나는 피 여사의 엉뚱한 대답을 들으면서 웃었다.
--- p.289

"피 여사,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라고요?"
"두바이?"
--- p.291

피 여사가 밥 잘 먹고 침대에 누웠을 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뜻밖에 피 여사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박 여사와 내가 옆에서 챙기는 게 고마워서 한 말이겠으나, 피 여사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답변이었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안에 행복이 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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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에 가까운 딸과 마흔 살이 내일모레인 손자가 백 살에 가까운 노인을 한 집에서 병간호하고 있는 풍경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아프고 눈물 난다. 다가올 우리의 미래와, 또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간 경험이 자연스럽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오래 돌본다는 일은 잠이 부족한 일, 눈물에 무덤덤해지는 일이다.
이인의 에세이 《나의 까칠한 백수 할머니》가 내 마음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묻는다면, 병과 간병과 고독 속에 드러나기 마련인 우리의 나약한 마음을 거짓 없이 묘파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웃기고, 아프고, 화나고, 부끄럽고, 서러운 마음들. 그 마음들과 함께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는 일. 이 시대의 돌봄이란 우리의 성장을 묻는 일이자 가족, 가부장제, 개인의 방관, 여성의 삶을 다시 질문에 부치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고통에도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팬데믹 시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이다. 이 책이 더 특별했던 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마음마저 돌봐주었다는 점이다. 가까운 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유대. 이 책이 고맙다.
- 이기호 (소설가)
미워하고 오해하는 데에는 단 한 순간의 계기만이 필요하지만,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끈기와 충분한 시간이 요구된다. 이 이야기는 한 손자의 할머니 간병기이자, 세대가 다르기에 가치관도 다른 여성과 남성의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대치의 기록이며, 한 청년이 함께 사는 사람들의 존재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서사이다.
저자는 돌봄 노동을 맡은 남성 청년의 입장에서 한 여성 노인의 내밀한 미시사를 톺아가며 당연한 것을 낯설게, 익숙한 깨달음을 새삼스레 곱씹도록 한다. 겸연쩍을 만큼이나 솔직하게 그려낸 삼대의 일상에는 위선도 위악도 없어서 진정이 진정 그대로 윤이 난다. 낙관도 비관도 함부로 하지 않는 긴 지켜봄이 아주 담담한 이해와 사랑에 닿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글을 읽는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작은 기적처럼 느껴지게 될 것이다.
- 박서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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