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리스본에 도착해 곧장 여길 온 건데, 뭐라고요, 철도 파업? 파어어업? 당장 앉고 싶고 눕고 싶고 씻고 싶고 울고도 싶지만 일단은 빨리 머리를 굴려야 한다. 2달간의 여행인데 첫날부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하며 머릿속의 노트북을 켜고 비극을 집필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비탄에 젖거나 분노할 시간에 어서어서 기차표를 환불받고 어서어서 대안을 찾는 게 낫다. 그리고 같은 일이라도 내가 요걸 재미있는 경험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하하하 웬일이야, 이거 두고두고 얘깃거리 되겠다며 웃어버리는 순간 정말로 웃긴 일이 된다.
--- pp.32~33, 「ESTJ가 여행하는 방법」 중에서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2006년 봄이었을 것이다. 스페인 북부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 날이 푸근해서인지 다들 가벼운 차림새인데, 어깨끈이나 후크 등 브라의 일부가 보이는 걸 신경 쓰지 않는 여성들이 많았더랬다. 곱게 자란 유교걸답게 일단 당황했는데, 잠깐, 어머 웬일이야, 저 사람은 아예 노브라인데? 미쳤나 봐!
--- p.43, 「노브라를 디폴트로」 중에서
관광업 인프라가 빵빵한 나라답게, 어지간한 태국의 식당엔 영어 메뉴판이 준비되어 있다. 보통은 인기 있는 추천메뉴를 맨 첫 페이지에 몰아놓는데, 똠얌꿍과 팟타이 그리고 솜땀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요 3종 세트라면 탕 하나, 국수 하나, 샐러드 하나인 셈이니까 둘이서 먹기에 적당하다. 물론 나는 혼자서 싹 다 주문한다. 애초에 맛있는 걸 먹으려고 여행하는 거라 아깝다 생각 않고 팍팍 시킨다. 밥을 추가해도 좋다. 폴폴 날리는 길쭉한 인디카 쌀로 지은 밥(카오 쑤어이)이라면 접시에 한가득 담아줄 거고, 향긋하고 쫀득한 찹쌀밥(카오 니아오)이라면 비닐봉지 안에 주먹만 하게 뭉쳐 담아 대나무로 짠 용기에 넣어줄 거다. 나는 단연 찹쌀밥이다. 요 따끈한 걸 손으로 조금씩 떼어서 솜땀이랑 같이 오물오물 먹으면, 그게 뭐라고 참 맛있다.
--- pp.62~63, 「화려한 컬러와 얼얼한 냄새가 가득한 곳」 중에서
그래서 나는 돌아다니기를 멈추고 한 지역에 오래 머물러보기로 했다. 얼마나? 2주일 때도 있고 2달일 때도 있다. 그 이상일 때도 있다. 포인트는 이거다. 지겨워질 때까지 있어 보기. 그렇다고 해서 ‘살아봤다’는 생각은 안 한다. 저 거기에서 살다 왔어요, 라는 말도 안 한다. 아니 못 한다. 여행은 돈을 쓰는 거지 돈을 버는 게 아니다. 아껴 쓰든 펑펑 쓰든,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훨씬 재미있다. 나는 여행하며 재밌게 놀았지,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 살아봤다는 말은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다.
--- p.69, 「‘우리 동네’라는 과몰입의 순간」 중에서
여러분은 브라질리언 왁싱을 해보셨나요? 나의 인생은 털을 뽑기 전과 후로 나뉜다, 라는 건 과장이지만 하고 나면 확실히 좋다. 편하고, 깔끔하고, 쾌적하고, 가볍다. 맨 처음 왁싱을 한 건 치앙마이에서였는데, 여행을 마치고 슬슬 떠날 때가 되니 치앙마이를 추억할 만한 뭔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근사한 타투 같은 걸 하던데 나는 왜 왁싱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정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요, 저는…. 하여간 인생 첫 왁싱, 이왕 뽑는 거 싹 다 뽑아달라고 했는데 이야, 그게 어찌나 개운하던지 홀딱 반해버렸다. 포르투에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한 번 더 쫘악 했던 것이고. 나 원 참, 다시 한번 말하지만 7,000원이라니 말도 안 되게 쌌다고요.
--- pp.80~81, 「첫 레게머리와 브라질리언 왁싱」 중에서
오전 10시. 노트북을 챙기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서 출근한다. 11시만 되어도 벌써 꽤 더워지니 그전에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코워킹스페이스에 쏘옥 들어가 앉는다. 냉큼 노트북을 펴고 일을 시작하는데, 인터넷 서핑을 하든 일기를 쓰든 내키는 대로다. 유튜브에 올릴 영상 편집을 할 때도 있고, 노트북은 접어두고 들고 온 책을 읽기도 한다. 오후 2시쯤 되면 퇴근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점심을 먹고, 들어와서 샤워하면 세네 시쯤인데, 보통은 이 시간쯤 되어야 햇살이 슬슬 누그러지기 시작해 바깥을 돌아다니기 좋다. 하루 중 제일 더운 시간을 요렇게 실내에서 피하는 것이다. 출퇴근 루틴이 딱히 필요 없는 여행을 할 때도 이 시간엔 마사지를 받거나 쇼핑몰에 가는 식으로 어디가 되었든 실내에 들어가 있는 게 좋다.
--- pp.137~138, 「디지털 노마드, 하루 딱 4시간만」 중에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건 마치 어떤 짧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경험하는 것 같다. 삶의 축소판 같다. 나는 매번 기승전을 거쳐 결을 마주한다. 매번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혼자선 생각밖에 할 게 없다. 지긋지긋하게, 질릴 때까지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런 게 싫고 두려워서 혼자선 떠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을 마무리할 때면 조용조용 자문한다. 여기서 끝난다면 어떨 것 같아? 여행이, 삶이 말이야. 한때는 고독을 바라고 원하면서도 무서워했던 것 같다. 고독에 끌리면서도 고독을 버거워했던 것 같다. 낯선 곳에서 낯선 시간을 숱하게 보낸 지금은, 고독의 기쁨을 안다.
--- p.177, 「고독이라는 사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