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동안 다양한 생존 문제를 접하고,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게 신체 항상성을 유지하는 방법들을 터득한 경험의 흔적이 저장되는 곳이 어딜까? 바로 복내측 전전두피질이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이웃인 침팬지의 뇌를 인간의 뇌와 비교해볼 때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곳 역시 바로 이 부위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
복내측 전전두피질에는 우리가 다양한 상황들을 현명하게 해결해오면서 얻은 귀중한 삶의 지혜들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복내측 전전두피질에 형성되는 정서적 직관들은 학습 결과인 셈이다. 이렇게 학습된 직관은, 다양한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해온 선택 후에 따르는 보상 혹은 처벌이라는 수많은 단순한 논리적 인과관계들의 거대한 집합체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랜 기간에 걸친 수많은 논리적 추론들을 통해 형성된 정서적 직관이 우리의 선택을 자동적이고 반사적으로 결정할 때, 우리는 이 선택을 비이성적이라 부를 것인가.
---「선택의 가치를 계산하는 뇌」중에서
그런데 우리는 왜 거의 항상 처음 얻은 보상을 통해 경험했던 만족감을 두 번 경험할 수 없을까? 처음과 유사한 수준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상의 강도를 높이거나 새로운 보상을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도파민 세포의 활동이 실제 보상보다 예측하지 못한 보상에 더 높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질문들의 답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시한다.
이 질문의 답은 어쩌면 신경과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알아내려는 뇌의 작동 원리와 직결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도파민 세포가 가진 변덕스러운 특성 때문에 우리는 더 높은 보상을 주는 새로운 자극과 행동을 찾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른다. 즉 이런 뇌의 작동 원리로 인해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설 경우 점점 더 강력한 보상에 탐닉하게 되는 중독 행동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도 바로 이 도파민 세포의 기능과 관련이 있다.
---「우리 뇌는 무엇에 쾌감을 느끼는가」중에서
자신이 얼마나 인정 중독인가를 체크하는 방법이 있다. 아주 간단하다. 스스로에게 이 질문 하나만 던져보면 된다. ‘나는 하루 몇 번, 어느 정도 강도로 타인에 대한 험담을 하는가?’ 물론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살 정도로 비윤리적 행동을 한 사람이나 자신에게 심각한 위해를 가한 사람을 비난한 것은 예외로 해야 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타인을 향한 험담을 일삼는 사람은 자신의 인정 욕구를 험담에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을 향한 비난, 혹은 타인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 등은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이나 상황에서 비롯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적응 행동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행동은 근본적으로 그 집단 내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본능적인 욕구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보다 더 강한 것이 있을까?」중에서
이타적인 행동의 진화적인 이점을 알아보고자 한 흥미로운 연구가 하나 있다. 이 연구에 참가한 대학생들은 각각 세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는 게임을 하도록 지시받았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팀에서 뽑힌 한 명이 물이 담긴 통 밑에 앉아 있고 같은 팀의 동료가 공을 던져 타깃을 맞히면 물이 담긴 통이 뒤집어지면서 그 아래 앉아 있는 동료가 물을 뒤집어쓰게 된다. 높은 점수를 얻는 팀에게 더 많은 상금이 주어지며, 이 상금은 팀 구성원들끼리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각 팀에서 선택된 한 명은 거의 항상 자신을 희생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점이다. 실험이 끝난 뒤 참가자 모두를 대상으로 여러 질문을 해보았다. 그 결과 대부분이 각 팀에서 가장 높은 공헌을 한 사람으로 희생자 역할을 수행한 동료를 꼽았다. 간단해 보이는 이 실험은 이타적 행동의 심리적 동기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은 장기적으로 볼 때 더 높은 이득을 주는 전략적 행동이 될 수 있다.
---「더 높은 보상을 얻기 위한 계산된 전략」중에서
복수에 성공하여 상대방이 나와 동일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경우 과연 을은 예상했던 만족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복수를 행한 을이 항상 긍정적인 경험을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 연구를 살펴보자. 여기서는 부당하게 금전적 이익을 취한 파트너로부터 상금을 빼앗는 복수의 기회를 참가자들에게 제공했다. 이와 함께 파트너에게 짧은 메시지를 전달할 기회도 주었다. 대부분의 메시지는 부당한 금전적 취득 때문에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참가자들은 파트너로부터 두 가지 유형의 답변을 받았다. 첫번째 유형은 파트너가 복수의 이유를 이해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유형은 파트너가 오히려 분개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받은 만큼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복수의 목적이고, 또 복수의 만족감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라면 두 번째 유형의 메시지를 받은 참가자들이 더 높은 만족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다. 파트너로부터 복수의 이유를 이해했다는 메시지를 받은 참가자들이 훨씬 높은 수준의 만족감을 나타낸 것이다. (...) 이는 무너진 형평성의 회복을 알려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자 신호가 될 수 있다. 갑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이 을에게 가장 큰 만족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복수심의 진짜 목적이 형평성의 회복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복수는 정말 나의 것인가」중에서
경우에 따라서 공감은 합리적인 판단이나 결정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작은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이번 달 말까지 주문받은 제품을 거래처에 납품하지 않으면 계약을 위반하게 된다. 최악의 경우 거래처를 잃을 뿐만 아니라 결국 회사가 부도를 맞고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당연히 직원들을 재촉해 일을 끝내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연이은 야근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직원들의 모습을 보니 측은함이 밀려온다. 이럴 때 과연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순간의 측은한 감정, 즉 공감에 휘말리면 당신의 결정은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도리어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낮은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이 더 쉽게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공감 능력이 낮으면 지친 직원들을 다그쳐 임무를 완수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더 쉬울 테니 말이다. 이런 논리에서 볼 때 지나친 공감 능력은 집단의 리더들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한 CEO 중에 공감 능력이 낮은 사람이 많다는 주장이 있다.
---「‘성공한 사이코패스’의 뇌 구조」중에서
많은 잘못된 혹은 부적절한 선택은 좋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조바심에서 비롯될 수 있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지나치게 불규칙하거나 불균형한 식단을 선택하는 경우,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이른바 ‘스펙’ 쌓기에만 과도하게 열중하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들이 ‘좋은’ 선택이라 규정하고 추구하는 가치는 대부분 신체 항상성 유지를 통한 생존 가능성 극대화라는 궁극적 목표보다는, 이로부터 파생되어 나타난 도구적 목표일 가능성이 높다.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 복잡하고 추상적인 형태의 보상이 도구적 목표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번 균형 상태를 회복하면 바로 사라지는 궁극적 욕구와 다르게 도구적 욕구는 균형 상태에 대한 기준이 불분명하다. 마치 높이 뛰기 경기에서 이전 시행에서 성공하면 계속해서 막대를 높이는 것처럼, 한번 보상을 받으면 다음번 기준은 더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도구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행동은 중단하기 어렵고 항상 더 강한 보상을 향해 끊임없이 지속되기 쉽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어쩌면 좋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버릴 때 비로소 좋은 선택의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네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봐.”」중에서
고귀한 인간성의 근원을 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파헤치는 행위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뇌과학적 관점은 인간성에 대해 우리가 가진 많은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사회화 과정을 통해 습관적으로 체득한 다양한 편견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심리학적·뇌과학적 관점을 취하는 태도의 이점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인간성을 훼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편견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받던 인간성의 참모습을 마주하도록 도울 수 있다.
뇌과학이 보여주는 도덕성과 이타성이란, 이기적인 나의 어두운 욕구를 억제하는 절대 선이 아니다. 오히려 내 주위를 둘러싼 여러 대상과 환경에 발맞추어가면서 내가 갖고 태어난 내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욕구일 수 있다. 도덕성과 이타성은 어쩌면 우리의 내적 욕구가 성장하면서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 지향점이 아닐까? 이 궁극적 지향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나 자신의 욕구는 결코 무시되거나 배제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 가장 큰 수혜자 또한 자신이 될 것이다.
---「가장 높은 생존 확률을 보장하는 선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