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를 살짝 데치고 간소한 양념으로 볶아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았고, 국물에 끓인 고사리는 오래 삶은 돼지고기처럼 야들야들하게 풀렸다. 그 고사리를 먹을 때면 내 삶도 조금은 부드럽게 풀리는 듯했고, 크고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이 들었다.
--- p.15, 강지희, 「미나리 할머니와 고사리 할아버지」 중에서
많은 비정규직이 점심을 거르기 일쑤고 불규칙한 생활을 한다. 누군가는 식사를 챙기고 몸 관리를 하는 것 역시 사소하지만 성실한 자기 관리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식사 메뉴만을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점심을 거르는 건 그 사람이 나약한 의지나 낮은 자존감으로 자기 관리를 놓쳐서가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가면 그렇게 되어버리는 상황의 문제일 때가 많다.
--- p.26, 강지희, 「점심이 없던 날들」 중에서
사무실 막내였던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부장님이 오늘은 초복이니 삼계탕을 먹자고 하면 그날은 입구에 각종 화분이 잔뜩 놓여 있는 삼계탕집 좌식 테이블에 앉았다. 이사님이 특별히 회를 쏘겠다고 하면 대리님 차를 얻어 타고 도시 중심가에 있는 회 식당으로 향했다. 삼계탕이고 회 정식이고 다 싫었다. 내가 원하는 점심 메뉴는 혼자 말없이 먹는 구내식당 밥이었다.
--- p.42, 김신회, 「구내식당 덕후」 중에서
엄마는 늘 내게 넘치도록 주고 싶어 한다. 다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어서 늘 사양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가 보고 싶어 만났으면서도 정작 그 얼굴 앞에서는 내내 투덜거리다가 헤어지고 나서는 나의 못남에 잠을 설친다.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내 밥상에는 엄마 반찬이 올라오고, 그걸 먹으며 만회라도 해보겠다는 듯 나는 문자를 보낸다. “너무 맛있네. 잘 먹을게요, 엄마.”
--- p.65, 김신회, 「효도 점심」 중에서
나는 음식을 남길 때마다 미묘한 죄책감을 느낀다. 두부를 반 모나 썩혀서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면 악몽을 꿀지도 몰랐다. 마침 된장찌개를 해 먹은 지도 오래되었다. 마땅한 재료가 양파랑 두부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애호박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싸고 맛있고 칼질하기 쉬운 애호박!
--- p.79, 심너울, 「잔디 된장찌개」 중에서
살짝 정직해지자면 나는 내가 틀리게 젓가락질을 하는 데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DOC와 춤을〉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 아니면 내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식기구를 조작하는 개척자였기 때문에?
--- p.85, 심너울, 「교정용 젓가락과 가정교육」 중에서
평일의 점심은 어쩐지 쓸쓸하다. 아무리 맛있는 메뉴를 선택해도 속도를 내서 먹어야 한다. 속을 터놓고 회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료는 없어진 지 오래. 내가 좋아하고 신뢰했던 이들은 모두 떠났다. 가끔 찾아와주는 전 동료, 기꺼이 속내를 드러내도 두렵지 않은 몇몇의 사람, 일로 만났지만 친구가 된 선후배들을 만나지 않는 한, 나의 점심은 여전히 외로울 전망이다.
--- p.98, 엄지혜, 「외로우니까 점심이다」 중에서
나는 아무래도 한낮(낮의 한가운데. 곧, 낮 12시를 전후한 때)보다는 대낮(환히 밝은 낮)이 좋다. 대놓고 “나 낮이거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래도 단어는 ‘한낮’이 예쁘다. 그러니까 책 제목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 주말 한낮에 만나요”와 “우리 주말 대낮에 만나요”는 얼마나 어감이 다른가?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면 무조건 ‘한낮’을 추천한다. 갑자기 ‘대낮’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벌건 대낮’이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괜스레 불콰한 느낌이다. 벌거벗은 것 같기도 하고.
--- p.105~106, 엄지혜, 「한낮, 그리고 수신확인」 중에서
내가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있다면, 이혼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다. 뒷일을 수습하는 건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고 긴 여정이었지만 그마저도 값진 경험이었다.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진리를 몸소 체험했으니까.
--- p.130, 이세라, 「그런 결혼은 없다」 중에서
시간에 대한 주도권은 내게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회사를 다닐 때는 별수 없이 내 일과표가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나는 그 틀을 따라야 했다. 그것이 조직의 기강이기에. 그러나 나는 이따금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전 직원이 12시부터 1시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만 밥을 먹지? 왜 그래야 하고요?
--- p.161, 이세라, 「일을 계속한다는 것」 중에서
외근 업무를 하다 보면 체력이 금방 소모되고 언제 신고가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끼니를 챙길 기회가 오면 101퍼센트 채워주는 게 좋다. 저녁을 적게 먹었다가 새벽에 출동 나가서 졸음과도 싸우고 저혈당과도 겨루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일을 하는 경험은 더 이상 쌓고 싶지 않다. 일에 제대로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꾸역꾸역 주어진 몫을 먹다 보니 소화불량과 위염을 달고 산다. 이게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집에서는 밥을(특히 저녁) 두 시간에 걸쳐 먹는다.
--- p.170, 원도, 「가파른 맛」 중에서
사실 회사에서 먹는 점심 식사는 가장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먹는 밥이라는 점에서, 때로는 입안 가득 떠 넣는 한 숟갈이 참으로 버겁게 느껴진다. 어떠한 목적 없이, 저마다의 밥벌이를 위해 좁고도 넓은 대한민국을 돌고 돌아 만난 각양각색의 사람들끼리 취향 따위 고려하지 않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먹는 식사는 얼마나 애석한가.
--- p.178, 원도, 「다짜고짜 뭐 먹을 거냐니」 중에서
점심은 읽기의 시간이 돼주었다. 가장 귀중한 시간이 된 거다. 점심에 주어지는 한 시간을 쪼개 10분에서 15분 정도 낮잠을 자고 남은 40분은 점심을 먹으며 읽고 싶은 글을 읽었다. 달콤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점심은 큰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이었는데. 전부 다시 끌어모으고 싶어졌다. 삶은 역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그렇게 스물다섯부터 서른 사이의 점심은 들숨의 역할을 했다. 절박했던 내게 그늘을 구비해준 시간이었다.
--- p.203~204, 이훤, 「어느 개인의 점심 변천사」 중에서
침묵을 하나둘 수저로 뜨며 사람들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것을 본다. 분주하구나. 우리는. 이곳에서 산다는 행위는.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을 고루 들으며 식사를 마친다. 수저를 내려놓는다. 다 먹은 그릇의 바닥을 보며 이어폰을 귀에서 뺀다. 소리 없던 세계의 볼륨이 빠르게 늘어난다. 음악이 사라지니 이곳은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듯하다. 접시 얹는 소리. 여기저기 들리는 수저와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 계산하기 위해 일어서는 누군가의 의자 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을 땐 이런 배경이 전부 소음 같은데, 이런 날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해주는 것 같다.
--- p.216, 이훤, 「9월」 중에서
운동의 문제는 운동이 스스로를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개인적인 매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의지 부족이니 뭐니 하는 핀잔을 듣는다. 운동과 신체만큼 정직한 게 없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른다 따위의 말이 뒤따른다. 이거 봐, 이거 봐, 내 안의 근육이 이만큼 자랐어! 몸에 관한 이러한 생각은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 할 것 없이 공통적이다. 과거에 정신을 찬양하고 몸은 경멸하는 풍조가 만연했다면 어느 순간 몸은 자신의 자리를 탈환하다 못해 거의 최종 심급이 된 것 같다.
--- p.235, 정지돈,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중에서
오한기 작가는 소설을 몰래 본다는 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도 회사 다닐 때 몰래 소설 썼어요.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몰래 틈틈이. 평생 돈에 쫓겨 살며 각종 직업을 전전한 스위스의 전설적인 작가 로베르트 발저도 일하는 틈틈이, 몰래 책을 읽고 몰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그건 그런 행위들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건전함이나 올바름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체제 전복적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일탈로도 여겨지는. 그러니 우리가 욕망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읽는 길티 플레저라면 누구에게도 해를 주진 않을 것 같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 몰래 읽고 몰래 쓰자.
--- p.237, 정지돈, 「길티 플레저」 중에서
항상 이동하면서 김밥을 먹거나 시간을 절약하고 돈을 아끼기 위해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점심시간이란 것이 내겐 없었는데 재택근무 이후 시간이 늘어났고 그 늘어난 시간에 점심시간이 끼어 있게 되었고 더불어 점심을 먹어야 하니 점심 준비 시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점심 준비 시간에는 음식뿐 아니라 늘어난 시간만큼 늘어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정리 해소용 시간도 포함되었다. 나는 최대한 만들어야 하는 식사를 준비하면서 걱정과 잡념을 지워나갔다.
--- p.254, 한정현, 「떡볶이와의 결별」 중에서
점심시간과 엇비슷하게 산책 시간을 갖게 되면서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을 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점심시간에 사람들이 밥을 먹는 것 외에도 정말 많은 일을 한다는 거였다. 병원에도 우체국에도 관공서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한 시간 동안 저렇게나 많은 걸 하는구나, 처음엔 이런 기분이 들었고 그다음엔…….
--- p.265, 한정현, 「우리의 점심은 그곳에 오래 남아」 중에서
집중력이 흐려질 때마다 위급 상황에 비상벨 누르듯 간식부터 찾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당류를 챙겨 먹지 않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머리가 둔해졌고, 손도 느려졌다. 중화반점도 아닌데 신속함이 곧 유능함의 척도였던 사회에서 나는 유능해지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밥은 걸러도 후식은 먹었다. 디저트 섭취 여부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하루치 몸과 마음의 힘이 달라졌다. 밥 대 디저트라는 이상형 월드컵에서 별 망설임 없이 디저트라는 선택지를 고르는 편이었다.
--- p.274, 황유미, 「서른 살 버릇, 마흔다섯까지」 중에서
올해 가을엔 점심시간에 동네를 산책하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직장인 무리와 마주친 적이 있다. 같은 명찰 목걸이를 찬 채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과 마주친 그 순간 잠시 몸이 흔들릴 정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은행잎은 회오리치는 바람을 따라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한참을 공중에서 맴돌았다. 그 순간 “저것 좀 봐”라며 누군가 손가락으로 하늘에서 춤추는 은행잎 한 무더기를 가리켰다. 감탄을 숨기지 않은 귀여운 어른 덕에 그 옆에 있던 어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어른스러움을 잠시 내려두었다. 은행잎의 움직임에 맞춰 춤을 추듯 근처를 서성이며 여러 각도에서 은행 회오리를 관찰하는 사람, 그 모든 풍경을 동영상으로 담으면서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매가 기분 좋게 휘어지는 사람, 손을 뻗어 은행잎 하나를 낚아채 주머니에 넣는 사람까지.
--- p.294~295, 황유미, 「어른의 귀여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