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애(白信愛)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부유한 집안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는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집과 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에 대구사범학교(경북도립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근 2년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이후 단신으로 상경하여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활동했으나, 열아홉의 나이에 돌연 시베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함경도 웅기항에서 출발하는 상선 화물칸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입국했으나 곧 체포되어 극심한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그 경험은 후에 작가가 되어 죽음을 앞둔 해에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고향 영천으로 돌아온 후에는 줄곧 지역활동에 전념했고,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의 어머니」가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하지만 작가활동을 이어가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에서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들에 전전하며 고학을 이어가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집안의 바람대로 결혼을 했다. 그의 집필은 결혼 이후 1934년에서 1939년 췌장암으로 죽기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여성』(1934년)에 수록된 「꺼래이」는 작가로서 다시 활동하게 된 재등단작이라 할 수 있으며, 5년 남짓한 기간에 소설 20여 편, 수필 30여 편 등을 발표했다. 마지막 작품 「혼명에서」는 병상에서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기간은 길지 않으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내내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다양한 주제에 접근하며 글을 썼다. 그는 봉건적 인습에 갇힌 여성들의 갈등과 분투,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현실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런가 하면 궁핍한 삶에서 비극에 이르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 등,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여성 작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려 노력한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