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있는 시점부터 우리 가족은 아침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시작은 주말 아침드라마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주 6일제였던 당시, MBC 〈한지붕 세가족〉(무려 413회를 방영했다!), KBS 〈일요일은 참으세요〉(손지창과 오연수가 함께 출연했다!) 같은 일요 아침드라마는 온 가족이 알람 없이 일어나 거실에 하나둘 모여 뒹굴뒹굴 빈둥대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즐거운 루틴이었다. 식탁이 아닌 거실에 주전부리가 하나씩 모이고, 일주일 만에 찾아온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드라마가 끝나고 주말 요리프로그램이 방영됐는데, 대충 보는 모드를 끝내고 메모를 해가며 프로그램을 경청한 아빠와 장을 보러 갔다가 오징어튀김을 사 먹고 들어오면 반나절, 아침에 본 요리를 우당퉁탕 해 먹고 나면 하루가 다 갔다. 지금의 내 나이 또래였을 부모님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그렇지만 휴일을 휴일답게 보내는 데도 나보다 훨씬 능숙했던 것 같다. --- p.11
아침드라마는 잠을 깨우는 역할뿐 아니라 하루를 구동시킬 동력 또한 얼마간은 제공해주었던 것 같다. 배가 아픈데 난데없이 손바닥을 꼭꼭 누르면 통증이 가시는 것처럼 관계없(지만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추진력을 주었던 것이다. 지루하고 평범하고 때로는 낙이 없는 시간들이 반복될 때면 아침드라마의 뜬금없는 스토리에 깔깔 웃으며 어물쩍 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해내기 위해서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이 괴로울 때면 5천 억이 있는 가짜 부모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계약 내용을 꼬치꼬치 따져 묻는 사람 한번 못 되겠는가 싶고, 주인공의 공을 다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자료실에 가두고 주요 파일을 지우고 CCTV를 없애고 애인까지 뺏는 상사를 보면서 고작 점심 메뉴를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내 상사는 정말 양반이다 싶고, 부모의 원수인 전 남편의 현 부인과 한 회사를 다니는 주인공을 보며 뭔가 조금 불편했던 동료 정도는 얼마든지 와락 끌어안게 되는 것이다. --- p.18~19
수험생 시절에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일종의 낭만과 안도감을 주었던 것 같다.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이 정도는 하고 살 수 있다는 위안 같은 것 말이다. 한편 직장인이 된 나에게 아침드라마는 식전 30분에 먹으라는 알약처럼 하루를 열기 직전에 복용하는 점막보호제 같은 것이었다. 또는 조금 치사한 방법이지만 내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와 사건을 견딜 수 있도록 비교우위를 갖게 해준 것 같다. --- p.23~24
아침드라마라는 장르 또한 비극이나 희극이라는 한 범주에 덥석 넣기가 망설여진다.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도 어딘가 딱 들어맞지 않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저 웃기는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스토리에 장엄한 BGM이 흐르고, 주인공들은 자주 오열한다. 그렇다고 슬픈 이야기라고 하기에 아침드라마는 반드시, 결단코 해피 엔딩에 이르고(그러고 보니 유일하게 〈겨울새〉 오리지널 버전이 새드 엔딩이지만 원작 소설을 따르느라 그런 것이니 열외로 두어야 하겠다), 사람들을(적어도 지구에서 세 사람만큼은…) 웃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한쪽을 정하자면 아침드라마는 비극에 가까운 것 같다가도, 아침마다 비극을 접하고 길을 나서는 사람치고는 나의 발걸음이 꽤나 흥겨웠던 것이다. 과연 아침드라마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 p.27~28
아침드라마 속 세상에서 단란한 4인가족이란 그저 조연을 넘지 못하는 평범하고 밋밋한 존재이고, 대부분의 주인공이 비혼모이거나(SBS 〈나도 엄마야〉), 계약결혼을 하거나(SBS 〈해피시스터즈〉), 전 부인의 현 남편의 전 부인이었던 여자와 전 부인이 다른 남자와 낳은 아이를 키우며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SBS 〈아모르 파티〉). 이혼가정이나 재혼가정은 너무 흔해서 명함도 내밀 수 없다. 과도한 극적 설정과 전개 덕에 ‘비정상적’ 형태의 가족이 유독 넘쳐나는 아침드라마는 어찌 보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급진적이고 대안적인 가족의 형태를 제안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중 최고봉을 꼽자면 바로 제목에서부터 정상가족의 신화를 뿌리째 흔드는, 2015년 SBS 드라마 〈어머님은 내 며느리〉를 들 수 있겠다. 대체 어머님이 무려 내 며느리인 상황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인지 한번 들여다보자. --- p.35~36
〈어머님은 내 며느리〉는 가족의 이름으로 엮일 수 있는 가장 낯설고 이상한 조합을 시연한다. 문자 그대로 시어머니를 며느리로 만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이 가족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 여기서 ‘정상’의 의미가 사전적 정의대로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라면 말이다. 성태는 봉주에게 일을 제대로 가르쳐 갱생시키려 애쓰고, 봉주도 느리지만 한 발 한 발 이를 성실히 따라온다. 현주는 시집살이를 대물림하지 않고, 경숙도 이런 현주의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친다. 뒤늦게나마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양 회장 일가. 어머님이 내 며느리이기는 해도, 이것이 정상이 아니라면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 p.39
2021년은 공중파 드라마에 성소수자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 해다. 2013년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 2010년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 등에서 납작한 조연을 통해 피상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그려졌던 성소수자가 2019년 이병헌, 김영영 작가의 〈멜로가 체질〉에 이르러 누나 무리들의 지지와 귀여움을 받는 남동생 이효봉과 애인을 통해 일상적이고 긍정적인 인물로 재현되더니, 2021년 박시현 작가의 〈런 온〉에서는 오빠 고예준이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라는 어려운 고백을 하자 ‘나도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그러냐’라고 반문하는 여동생 고예찬의 목소리를 빌려 성소수자에게 지지를 전했다. --- p.93
아침드라마를 볼 때면 늘 조연의 순조롭고 평화로운 삶에 감탄하게 된다. 조연은 모든 면에서 대단히 출중하지는 않지만 철이 없는 대신 구김도 없으며, 쉽게 실수하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용서받는다. 주인공에게 몰아준 위기와 고비와 역경과 운명의 장난은 조연에겐 한갓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조연은 드라마의 협찬사가 어디냐에 따라 의료기기 매장이나 의류 매장, 치킨집 등으로 종목만 달라질 뿐 사장님이라는 자리에 손쉽게 입성한다. 늘 먹고사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아도 시댁에서 쫓겨난 친구를 재워줄 넉넉한 방 한 칸은 늘 있고, 조연의 사춘기 자식들은 부모의 재혼 정도는 당연히 환영할 만큼 늘 쿨하다. 오랜 시간을 백수로 지내왔음에도 조연이 차린 치킨집은 늘 맛있고, 우연히 개발한 소스로 이내 승승장구하게 된다. 못난 자식 때문에 늘 혈압이 오르는 대기업 회장님도 부럽지 않다. 팔자가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는 없다.
--- p.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