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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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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3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492g | 135*210*30mm
ISBN13 9791167371393
ISBN10 116737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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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쪽의 책에서 단 4쪽밖에 나오지 않는 단어가 어째서 사람들에게 이토록 특별한 인상을 주었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나름대로 추리하자면 ‘엠퍼시’를 다룬 책이나 기사는 전부터 일본에 많이 소개되었지만 대부분 ‘엠퍼시’를 ‘공감’이라는 단어로 번역했고, 사람들이 이에 위화감을 느껴왔던 게 아닐까. 다들 오래전부터 ‘공감하지는 않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한 ‘엠퍼시’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은 아닐까.
---「들어가며」중에서

예를 들어 영국에서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을 상상하면 범인을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극단적인 목소리가 SNS에 떠돌고,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량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도 냉정하게 피해자와 가족의 마음이 되어본다면, 당사자들은 불행한 사건을 잊고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꾸 사건이 뉴스가 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해자에게 복수할 마음을 먹는 것은 자신의 상상과 분노를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투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며 실은 자기 신발을 신고 타인의 영역을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꼴이다.
---「‘엠퍼시가 문제다’론과 ‘엠퍼시가 중요하다’론」중에서

벽에 다양한 표정의 사람 사진을 붙이고 “이건 어떨 때 짓는 표정일까?” 하고 묻는다. 웃는 얼굴을 보며 “행복할 때”, “초콜릿을 먹을 때”라고 대답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전혀 반응을 하지 않거나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웃는 사람 얼굴을 가리키며 “엄청 혼이 났을 때”라고 대답했던 아이다. 엉터리로 대답해서 웃기려는 것인가 싶어 “응? 혼이 났을 때 이런 표정을 지을까?” 하고 되물었더니, 그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안 웃으면 혼나”라고 대답했다. 기쁠 때 웃고 슬플 때 운다는, 감정과 표현의 회로가 올바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감정 공부」중에서

결국 사재기는 대단히 이기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신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커뮤니티 전체를 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염병처럼 커뮤니티 전체가 개선되지 않으면 만연하기 쉬운 병의 경우, 자신의 미시적인 행동이 거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미시적인 불행(코로나에 걸려 위중한 상황에 처하는 것과 같은)이 찾아온다.
이처럼 타인의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여 행동하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이타적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는 역설적인 고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이타적이 되면 이기적이 된다」중에서

그런데 영국이 록다운에 들어간 뒤 아이의 학교 온라인 수업에서 내준 영어(그러니까 국어) 과제가 대단히 재미있다. 아이 반에서는 요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고 있는데 그 수업에서 나온 과제다. 내가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러브레터를 써보라는 것이었는데,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면 여자는 줄리엣이, 남자는 로미오가 되어 편지를 써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 세대는 다르다. 첫째 주에는 모두 로미오가 되어 최대한 라임(운율)을 살려 랩 느낌의 연애편지를 쓰라고 했다. 그다음 주에는 모두 줄리엣이 되어 자신만의 오리지널 메타포를 적어도 한 가지, 클리셰(빈번히 사용되는 문구나 표현)를 적어도 세 가지 써서 클래식한 편지를 쓰라고 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중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던 두 살 아이가 자동차가 잘 나가지 않자 짜증이 나서 벽에 집어던진다면, 보육사는 아이에게 “너 지금 화가 많이 났구나”라고 말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장난감 자동차가 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분했겠네. 장난감이 움직이지 않으면 답답하니까”라고 아이가 어째서 분한 감정이 드는지 설명해줘야 한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언어화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이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의하고 이름 붙임으로써 타인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기 안에서 알맞은 언어를 찾아 이해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슬퍼, 화나, 외로워’ 같은 말이 그 감정을 품는 이유와 연결되면 다른 아이가 장난감을 집어던지는 모습을 보고 “저 아이는 화가 났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처럼 인지적 엠퍼시란 타인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 감정을 품게 된 이유를 논리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학습과 훈련의 결과다.
---「엠퍼시에도 선천성과 후천성이 있다?」중에서

SNS의 ‘좋아요!’는 심퍼시(혹은 감정적 엠퍼시)를 표현하기 위한 장치이며, 나에게 심퍼시를 느낀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순식간에 측정할 수 있는 도구다. 나와 공명·공감해줄 사람(‘그래 그래’, ‘맞아 맞아’) 혹은 호감을 느낀 사람(‘예뻐’, ‘젊어’ 같은 말도 이에 해당한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아아, 나도 아직 살아 있구나” 하고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실감하는 것이다. 스즈키는 이런 실감을 손쉽게 얻을 수 있기에 의존성이 높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심퍼시는 기다리지 않는다」중에서

그런데 어째서 ‘해피 허즈번드, 해피 라이프happy husband, happy life’라는 말은 없었을까. 그것은 여성이 항상 가정에서 남성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그늘에서 다양한 무보수 노동을 했기 때문이며(남성이 주름투성이 셔츠를 입고 출근하지 않도록 다림질을 하거나 직장에서 돌아오면 마실 수 있도록 냉장고에 늘 맥주를 채워두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쓰는 의미나 필요성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의 경우 허즈번드가 해피해도 자기 자신의 라이프는 해피하기는커녕 너무 지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앞서 지적했듯 사회 불평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아래쪽에 있는 사람이 위쪽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며, 위쪽에 있는 사람은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페미니스트의 주장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여성은 남성을 생각해서 상대를 위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지만, 남성은 여성을 별다르게 케어하지 않는다. 이는 흑인과 백인, 피고용자와 고용주, 빈곤층과 부유층의 관계에도 대입할 수 있다.
---「엠퍼시 착취와 자기 상실」중에서

나는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 아기에 대해 다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은 교실 한가운데 초록색 담요를 깔고 그 위에 아기를 앉힌 뒤 어린이들이 담요 주변에 앉으며 시작된다. 지도자가 아기에게 장난감을 쥐여주고 놀다가 어린이들에게 질문하다. “지금 아기는 조바심이 났어요. 장난감에 손이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조바심을 느끼고 화가 나나요?” 그러면 어린이들은 자기가 조바심을 느끼거나 화가 났을 때를 떠올리며 말 못 하는 아기가 느낄 감정을 상상한다. 학교 생활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반 아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또 있을까?
---「엠퍼시를 기르는 수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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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영국, 아이와 어른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글을 쓰는 보육사이자 작가 브래디 미카코는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는 일’에 관하여도 신발과 신발 ‘사이’에서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게 열렬히 공감한 나머지 그에게 지배당한 듯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는 타인의 신발을 신고 그저 타인의 길을 따라간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타인에게 종속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누구의 처지에 대해서도 상상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신발을 신고 자신의 길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이 책은 당파성에 휘둘리지 않고 튼튼한 개인으로 살면서, 다른 존재의 입장을 이해하고 상상하며 집단적인 차별에 맞서는 개인이란 누구인지, 그러한 개인들로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에 관한 성실하고 친절한 탐구서다. 독자와 이 책 ‘사이’에서, 타인을 깊이 이해하면서도 지극한 나 자신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길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김원영 (변호사,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직접 신발을 신어보지 않고는 그 신발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 밑창이 충분한지 아닌지, 가벼운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브래디 미카코는 단순한 공감Sympathy을 넘어 타인의 신발을 직접 신어봄으로써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인 엠퍼시Empathy를 권한다. 엠퍼시라는 상상력을 통해 나와 너의 세계가 만날 수 있음을, 혐오와 편견을 넘어설 수 있음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 이길보라 (영화감독, 『당신을 이어 말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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