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항상 옆에서 잡아주고 앞에서 끌어주면 아이는 편할지 몰라도 자기의 힘과 능력을 확인할 기회를 잃는다. 나의 생명력이 어디까지 뻗을 수 있는지, 나의 탄성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자리는 한발 떨어진 뒤쪽이다. 아이가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잡아주고, 지치고 힘들어할 때 뒤에서 받쳐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다.
--- 「다친다는 것은」 중에서
어떤 전공이 미래에 살아남을까,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께 스마트폰이 그러하듯이, 그보다 먼저 가신 할아버지께 시험관 시술이 그러하듯이, 2000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께 유튜버가 그러하듯이, 미래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과 기술과 직업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이며 기술, 직업을 꿰뚫는 기본 중의 기본이 있다. 읽고 이해하고 쓰는 능력, 질문하고 대화하는 능력. 이것들은 세상 그 어떤 일을 하든 꼭 필요한 능력이다. 어떤 물건, 어떤 기술, 어떤 직업이 새로 생겨나든간에 이 기본 능력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읽고 이해하고 쓰고 질문하고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 「공부라는 것은」 중에서
아이들이 돈이라는 개념에 대해 교실에서 질문을 하고 생각을 나눌 기회를 충분히 가지는지 잘 모르겠다. 아이들은 뉴딜정책이며 인플레이션 같은 용어는 배워도 정작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계약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내 안의 흥청이 망청이들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같은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이 중요한 걸 대체 왜 가르치지 않는 걸까. 영어단어 몇 개 모른다고 죽지는 않지만 신용이나 부채 관리법을 모르면 삶이 통째로 위협받는데. 이십 대가 되어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초보 성인’들이 신용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어처구니없이 적은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찬란해야 할 젊은 시절에 숨 막히는 그늘이 지는 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신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유지되며 어떻게 불량이 되는지, 카드의 혜택만 나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부터 강조하고 알려줘야 한다.
--- 「경제관념이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중에서
독일 아이들은 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굉장히 솔직 담백한 교육을 받는데, 아주 어린 나이부터 생활 밀착형으로 그 나이에 꼭 필요한 부분을 단계적으로 배운다. 우선 미취학 아동들은 동생이나 사촌의 탄생을 자주 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에 맞춰 아기의 탄생과 관련된 그림책으로 남녀의 차이와 인체의 모습, 생명의 가치 등을 배운다. 이 그림책들을 보면 정말 솔직 담백하게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에 관한 내용이 가감 없이 담겨 있다. 체모를 비롯한 성인의 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수정 과정도 정자와 난자가 동글동글 세포 차원에서 만나는 수준이 아니라 사실적인 성관계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는 솔직 담백함이 단연 눈에 띈다(솔직히 말해서 도서관에서 그림책 열어 보다 깜짝 놀라서 덮은 적이 있다). 예쁘고 귀여운 그림과 아이들의 언어로 모호하게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솔직함이 아이들에게 트라우마를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독일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다. 괜히 비밀로 꽁꽁 싸둬 애먼 상상력만 불러일으키지 말라는 입장이다.
---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중에서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스로가 부여한 자리, 시상대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만으로 꽤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광활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겸허해졌으면 좋겠다. 주변의 인간들에게 친절한 만큼, 주변의 동물에게도 식물에게도 다정했으면 좋겠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나의 아이들이 삼촌처럼 몸 을 내어주는 나무들에게 고마워할 줄 알았으면 좋겠고, 열심히 뽈뽈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벌레를 아무 이유 없이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 「만물의 영장이 아닌 만물의 친구로 자랐으면」 중에서
정답은 없겠지만 정답처럼 마음에 품고 가고 싶은 말은 있다. “신호등 같은 어른이 아니라 가로등 같은 어른.”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함께 고민하는 모임에서, 어른이 해야 할 역할을 이렇게 표현하신 분이 계셨다. 이렇게 다정하지만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부모가 되면 어떨까. 물론 어린 자녀를 둔 부모는 종종 신호등의 역할을 해야 할 테지만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가로등으로 변할 수 있으면 어떨까 싶다. 딜레마를 극복하기는 어려워도, 우리 아이들이 늘 은은한 빛 속에 서 있을 수 있도록.
--- 「I의 사회, We의 사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