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기쁨은 단순하고 쉽고 가벼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짧은 영상을 볼 때 혹은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할 때 잠시는 좋지만 그 삶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공허하고 허무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진정한 기쁨, 즉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행복은 놀라지 않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된 상태라는 것이죠.
벤야민의 이야기에 비춰 우리의 삶을 돌아볼까요? 지금 우리는 행복할까요? 아닐 겁니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어떤 사건(해고, 이별, 사랑, 죽음)이 들이닥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깨닫게 되니까요. 갑작스레 해고나 이별을 당하면 언제나 자신감 넘칠 것이라 믿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잔뜩 위축되고 겁먹은 ‘나’를 깨닫게 되어 소스라치게 놀라죠. 갑작스레 사랑이 찾아오면 언제나 냉철할 것이라 믿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하루 종일 감정의 요동에 휩싸인 ‘나’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죠. 죽음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할까요? 그건 ‘나’를 진정으로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 ‘나’를 알기 어려운 것일까요? 진짜 ‘나’의 모습은 우리가 긴 시간 외면해왔던, 복잡하고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금 고되고 불편하더라도, 복잡하고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들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일 겁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우리는 왜 무기력해지는 걸까? 종종 무기력에 빠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플라톤’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의 의미는 세상 너머에 있는 ‘형상(이데아)’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플라톤’적 세계관. 이제 우리는 무기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플라톤’적 세계관을 받아들인 만큼 무기력해진다!
(...) ‘들뢰즈’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유쾌하고 활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정해져 있는 삶의 의미 같은 것은 없고,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서 삶의 의미가 구성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오늘’과 ‘내일’은 주어진 ‘형상(운명)’을 발견해야 할, 퇴행적이어서 우울한 시간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삶의 의미를 만들어갈 새로운 ‘지층(마주침)’을 형성할 기쁘고 유쾌한 시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정해진 의미는 없다는 것. 대상의 의미는 오직 우발적 마주침에 의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것.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활력 넘치는 삶을 원한다면, 과감하게 ‘들뢰즈’의 세계로 들어서야 한다.
---「‘왜 무기력해질까요?’」중에서
우리는 목적 없는 존재들을 긍정할 수 있을까? 돈을 벌지 않는 일, 책을 내지 않는 글, 목적지가 없는 여행, 더 나아가 태어난 이유를 알지 못한 삶. 그런 목적 없는 ‘일’, ‘글’, ‘여행’ 그 리고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그런 목적 없는 존재들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넘는다는 것은, 달리 말해 우리 시대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목적론적 삶의 태도를 넘어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목적론적 세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그냥’ 하면 된다. 불필요한 의미 부여나 거창한 삶의 목적 없이 ‘그냥’ 살면 된다. 교양을 쌓기 위한 음악이 아닌 ‘그냥’ 듣는 음악, 돈을 벌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닌 ‘그냥’ 쓰는 글,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 아닌 ‘그냥’ 하는 여행. 이와 같은‘그냥’ 사는 삶으로 목적론적 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때 알게 된다. ‘목적론’적 세계는 우울한 세계고, ‘그냥’의 세계는 유쾌하고 명랑한 세계임을. 당연하지 않은가? ‘목적’ 없이 ‘그냥’ 하는 일들은 반드시 기쁨이 넘치는 일들이니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더 아는 척 매뉴얼’」중에서
믿음에는 두 가지 믿음이 있다. 앎 이전의 믿음과 앎 이후의 믿음. 전자는 ‘신앙적 믿음(알기 위해서 믿는다!)’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이성적 믿음(알아야 믿는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말하는 관계가 전제하는 믿음은 무엇일까? 후자다. 우리는 아무나 믿지 않는다. 그 사람 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이성(경험?논리)적으로 따진 후에 믿게 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생긴 후에야 우리는 소위 사랑이라는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는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이성적 믿음’은 역설적으로 불신이기 때문이다.
‘나’ 아닌 ‘한 사람’을 어떻게 완전히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안셀무스가 만났던 ‘신’과 우리가 만났던 ‘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안셀무스가 어떤 지성으로도 ‘신’을 다 이해할 수 없었듯, 우리 역시 복잡하고 미묘하게 뒤엉킨 삶의 맥락이 만든 ‘한 사람’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한 사람’을 알 수 있는 만큼 알게 되고, 그 만큼만 믿는다. 이는 뒤집어 말해, 알 수 없는 부분만큼은 불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한 사람’ 을 ‘믿는다’,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계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믿지 못하는 것 앞에서는 항상 나를 보호해야 하니까 말이다.
진정한 사랑, 즉 ‘계산하지 않음’으로 갈 수 있는 믿음은 ‘신앙적 믿음’이다. 매혹적인 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뭔가 알려고 하지 않고 그냥 믿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신앙적 믿음’이다. 마치 절대자인 ‘신’을 믿듯, ‘한 사람’도 그렇게 믿게 될 때가 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그 매혹적인 사람을 알아가게 되고, 그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싹튼다.
이 ‘신앙적 믿음’으로 시작된 사랑에 계산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기도 전에 이미 믿어버린 사람 앞에서 어떻게 계산 따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늘 더 주어도 덜 준 것 같아서 미안하고, 늘 덜 준 것 같은데도 미소를 보내주니 그리도 고맙다. 이것이 사랑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중에서
기독교든 자본주의든 초월적 대상을 욕망하는 모든 종교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허무와 공허로 내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초월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실존적 조건을 초월하려는 모든 신적 욕망의 끝에는 지독한 슬픔이 있을 뿐이다. 기쁨은 삶 ‘밖’이 아니라 삶 ‘안’에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긍정해야 한다. 아퀴나스는 틀렸다. 진리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가 아니다. 진정한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불일치다. 생각만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순수한 정신노동은 없다. 정신노동을 향한 열망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초월하려는 헛된 욕망일 뿐이다. 노동 없는 삶을 추구하지 말라. 그것은 몸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헛되고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거꾸로 안다. 노동 없는 삶이 기쁜 삶이 아니다. 노동하는 삶이 기쁜 삶이다. 다만 우리가 기쁜 노동을 마주치지 못했을 뿐이다. 초월적 존재가 되려고 하지 말고, 두 발을 땅에 꼭 붙이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우리네 삶을 유쾌하고 명랑하게 만들어줄 직업은 그렇게 찾을 수 있다. 가장 기쁜 삶은 죽기 전날에도 하고 싶은 노동을 찾은 삶이다.
---「‘일하지 않고 돈 벌고 싶은가요?’」중에서
“시를 마음으로 새겨야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머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 질 들뢰즈, 『차이의 반복』
들뢰즈는 시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마음으로 새기는 것이 진정한 반복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반복은 심장을 따르는 일이다. 진정한 반복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말처럼,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심장’을 따르는 일이 어디 쉽던가? 우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인 ‘머리(이성)’에 익숙하다. 이것이 우리가 시를 반복하지 못하는 이유다. 시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돈이 안 되니까.
‘시’를 ‘사랑’으로 바꿔 읽어도 좋다. ‘사랑’ 역시 진정한 반복이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으로 새겨야 하고, 그것은 ‘머리’를 굴리는 일이 아닌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니까 말이다. ‘차이 없는 반복(직장)’에 질식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탐닉(쇼핑)’을 할 뿐, ‘차이의 반복(사랑)’에 쉽사리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벌고 쓰는 삶이 가장 중요하기에 ‘진정한 반복(차이의 반복)’은 외면했던 것 아닌가?
우리 시대 너머에 있는 철학자, 들뢰즈가 낡아 보이는 종교 철학자 키르케고르를 주목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다. ‘진정한 반복’에 대한 열의를 잃어버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목숨을 건 도약’이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이성’이 아닌, ‘자본’이 아닌, 바로 ‘타자’를 향한 목숨을 건 도약! 그 도약이 공허함과 무의미를 넘어 활력과 유쾌함이 넘치는 땅으로 나아가게 해줄 테다.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할 반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가 로도스다. 뛰어내려라(Hic Rhodus, hic salta)!”
---「‘반복되는 삶이 지겨운가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