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있는 / 사람은 / 세월이 지나도 /
늘 / 그리움으로 / 남는다.”
아침에 글을 쓰고 있는데, 이런 글이 한 친구에게서 문자로 온다. 글과 같이 보낸 가느다란 두 줄기 끝에 핀 꽃도 난처럼 수려하고 고고하다. 이렇게 우아한 글 받아보기는 처음인 것 같고… 보낸 글에 그 영혼의 그윽함이 번져온다. 그의 숨은 향기처럼.
나도 그에게 이런 답글, 아니 보낼 수 없다.
“글을 쓰고 있는데, 당신의 그윽한 향기가 번져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일은,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고, 가장 그답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신 가치를 제가 잘 알아보고, 발견한 것 아닐까요(외람되지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건 능력이나 영력도 아닙니다. 조용한 겸허함, 조용한 순종 ― 이 귀한 걸 당신은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그윽한 향기 되어 만나는 이에게(제게), 여향(餘香)으로 남습니다.”
--- 「향기 있는 사람은」 중에서
“아무리 고운 색깔도 빛의 생채기”
어느 성직자 화가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 성직자 화가가 말한 빛은 창조주의 빛,
거룩한 온전한 빛을 말하지 않을까…?
내가 오래 전에 시골 친구 집에서 한 7일쯤 묵었다. 바쁜 친구 위해 청소도 해주고 설거지, 계란 프라이라도 해서 식탁 준비하는 친구를 도왔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가 한 말.
“기일혜 씨는 색깔이 없어요. 색으로 말하면 무색이어요.” 그럴까? 내가 무색이라고, 나를 팔색조라고 하는 친구도 있는데… 세상에 의인은 없듯이 세상에는 온전한 빛도 없는 것? 온전한 빛은, 빛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창세기의 말씀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1~5)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참 빛’이라 하신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예수님) 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9~12)
사람이 만든 아무리 고운 색깔도 빛의 생채기란 말,
성경 말씀으로 비춰보니 더 이해가 된다. 그 화가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온전한 빛, 참 빛을 찾아가는 구도자인가?
성도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의 제자들이고.
--- 「아무리 고운 색깔도 빛의 생채기다」 중에서
거실에 조그만 히아신스 화분 둘을 놔두고 가끔 들여다본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에 히아신스 꽃봉오리 올라오는 것 보는 즐거움이 내 살아있음을 확인해 준다.
오늘 아침에도 화분을 들여다본다. 튼실한 히아신스 하나는, 봉오리가 탐스럽게 사람 주먹만하게 당당하게 올라오고. 그 옆, 연약한 히아신스 푸른 싹은 땅에 붙은 채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다. 자라기엔 아직 힘이 모자라는가,
며칠째 그대로 있는 게 안쓰럽기도 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아 이게 웬일! 연약한 몇 겹 이파리들 속에 작은 자주색 점 하나가 찍혀 있다. 히아신스 자줏빛 꽃 순이다.
“어머! 이 아기 히아신스가 꽃을 머금고 있어, 여보 이것 좀 봐요!”
내가 소리를 꽥 지르니, 남편이 가까이 온다.
나는 그 꽃 순이 하도 작아서, 남편 눈앞으로 가져다 잘 보이게 하려고 얼른 들어 올리다가 그만 ― 옆에 튼실한 히아신스 분을 넘어뜨린다. 히아신스 분이 거실 바닥에 엎어지면서 흙이 쏟아진다. 그래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보 이 꽃 순 좀 보라고요! 이 꽃 순을!”
그때, 남편이 꽃 순을 보면서 엉뚱한 말을 한다.
“당신은 순정(純情)의 여인이야. 순수한 열정의 사람, 내게 이 꽃 순을 보이려고 하다가 옆에 화분을 엎어버리고… 그런데 이 흙을 어쩌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어요. 그런데 당신이 아내를 처음으로 칭찬하네, 순정의 여인이라고…”
기분 좋은 내가 손으로 흙을 쓰다듬어 담는다.
이 화분 흙 좀 쏟아진 게 뭐가 문젠가. 아내의 순정을 오랜만에 남편 입으로 시인했는데… 아기 히아신스의 연한 꽃 순 하나가 오늘 아침, 내게 준 행복이다.
인생의 행복이란 곧 사라지는 짧은 숨결 같지만, 이 짧은 순간이 ― 한 여인의 행복이라는,
‘영원 같은 순간’이 되기도 한다.
--- 「내 순정을 전하려다 그만!」 중에서
오빠 회갑 땐가, 오래 전에 올케언니가 고급 담요를 형제들에게 선물했다. 담요 한 장 없으면서도 좋은 것 보면 남 주기 좋아하는 내가 어느 친구에게 그 담요 선물하고, 싼 담요 동네 가게에서 사서 쓰다가, 살던 아파트 재건축 때 살림 줄여 이사 가면서 버렸다.
나이가 든 노부부가 겨울 거실에 앉아 있으면 포근한 담요 생각이 난다. 여러 사람에게 담요 어디서 사느냐고 묻기도 하면서, 여태껏 한 장도 못 사고 지내다 이번 겨울엔 꼭 사려고 눈여겨보았다. 그러다가 우리 부부가 사러 간 곳은 동네 이불 가게, 거의 다 무늬가 혼란해서 맘에 안 든다.
다음에 사려는데, 하루는 남편이 어느 지하철역 근처 가게에서 담요 파는 걸 봤는데, 내가 보면 좋아할 색상이 있더라고. 마침 그 근처 사는 친구에게 드릴 게 좀 있어서 간 김에, 남편과 만나서 그 담요 가게에 들렀다. 그 가게 것 아니고, 다른 가게 것이 맘에 들어 두 장 샀다.
세탁해서 거실에 한 장 놔두고 내 방에 한 장 놔두니, 연한 저녁노을 색 바탕에 자잘한 흰 구름송이 같은 게 아늑해서, 마음까지 추운 내 겨울을 포근히 안아준다. 이건 담요가 아니라 가을 석양 무렵, 자잘한 흰 꽃들 자욱한 들녘이다.
모네의 “개양귀비 꽃” 그림 속, 자욱한 풀밭 밑으로 펴 놓은 내 방 담요는 나를 끌어올린다… 은은한 노을 색에 묻힌 듯 숨은 듯, 자잘한 흰 꽃송이들은 내 미감과 환상까지도 채워준다. 몇 만 원짜리 동네 가게 담요가 수십만 원짜리 고급 담요보다 나를 더 포근하게 감싸준다.
거실의 담요도 겨울 거실의 냉기와 외로움을 포근하게 덮어주고… 남편의 심미안이 고맙고 이렇게 우아한 색상으로 담요 만든 이에게까지 감사하면서, 나는 그 장인은 신의 영감을 받은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 「일상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 담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