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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만, 살아야겠어

아프지만, 살아야겠어

: 유방암 환자의 몸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

리뷰 총점9.8 리뷰 9건 | 판매지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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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92쪽 | 302g | 140*205*11mm
ISBN13 9791197170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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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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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암 환자라는 게 자랑스럽지는 않다. 그저 암 환자라는 것뿐. 그것뿐이다. 암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음이란 이토록 외로운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이걸 받아들여야 할 사람도 나고, 함께 살아가든 떨쳐내든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 할 사람도 결국 나뿐이라는 걸. 이렇게 중요한 것을, 살아가는 매 순간 선택이란 걸 할 때에는 왜 잊었는지. 후회는 불가피했다.
--- p.7

생각하는 것보다 암 환자의 일상은 지루하다. 죽음이라는 단계에 가까이 있기에 뭔가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한 것 또한 사실인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평소와 같은 하루, 가끔씩 찾아오는 슬픔의 파도, 주변 사람들의 폭풍과도 같은 관심.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의 그런 관심을 받는 것이 달갑지가 않다. 역할이라는 외피에 나를 가둬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정말 싫은데 가장 추레하고 어울리지 않은 옷을 하나 더 껴입은 것 같다.
--- p.14

수술 후 컨디션을 묻는 사람들에게 ‘수영을 못 해서 죽을 것 같다’고 하면 대체로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그 정도면 괜찮은 거네. 근데 아니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니까 참는다. 수력을 말하자면 수영선수도 아니고 시작한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꼭 수영이라서가 아니다. 매일 아침 하던 요가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암 환자를 위한 요가 동작이랍시고 비슷한 것들을 하면서 달래고 있는 정도다. 수영이나 요가로 대표되는 일상의 루틴들. 그게 방아쇠다. 바로 딱 거기가 내 슬픔이 터지는 지점인 것이다.
--- p.34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에서 밀어 놓았던 몸을 살펴보는데 몸을 묶어놓았었는지 팔 안 쪽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테이프 자국일까. 묶은 자국일까. 어쨌든 수술대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수술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멍을 보고서는 감정의 결이 달라졌다. 아무리 암을 유발하고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게 내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도 그동안의 생활방식이나 습관에 대해 탓하게 되는 순간은 이런 식으로라도 온다. 미안해.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멍 자국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멍은 일주일이면 사라지겠지만 가슴에 있는 긴 흉터자국은 그보다 오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 p.52

손쉽게 회피를 선택했으니 좋은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사춘기는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몸이라는 단어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도 있고, 감각이 느껴지는, 분명히 실체가 있는 대상이지만 나는 이후에도 몸을 없는 것처럼 다뤘다. 그런 시절을 거쳐 유방함 환자로 살아가면서 나는 어쩌면 그 대가를 혹독한 방식으로 치르고 있는 셈인지도 모르겠다.
--- p.60

차마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재발이나 전이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못하고 있다. 암이라는 얘기를 전할 때만해도 암 환자 같지 않다는 말 듣기를 지상목표로 삼은 사람마냥 씩씩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쪼그라들어 있다. 눈에 보이는 암 덩어리는 제거했지만 나는 평생 암 환자 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 p.72

특정 암에 표준 치료라는 것이 존재하듯 인생에도 ‘비결’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당장이라도 배우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인생의 비결을 배우려면 왠지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느낀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는 평범하고 단순한 깨달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고도, 그럼에도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듣고 보고 깨달았기에, 정말로 괜찮다.
--- p.85

퇴원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완전하지가 않았다. 혼자서 머리 묶는 것도 불가능하고 3주 가까이 되는 동안 씻지 못했기에 때를 박박 벗겨내고 싶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속 시원하게 씻을 수도 없었다. 멀리 있는 걸 집거나 위에 있는 물건을 꺼내야 할 때는 하다못해 자식들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다. 다른 사람의 호의와 도움에 기대야 하는 일상. 솔직히 당장은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관념보다 내 손으로 내 눈곱을 뗄 수 있는 일상의 담론이 더 시급했다. 구별짓기를 견디다 못해 내년쯤 유륜 타투 시술에 선뜻 동의하게 될 수도.
--- p.90

중요한 것은 이미 한 선택에 후회의 꼬리를 내리지 말기. 오로지 선택과 행위의 실천으로만 나 자신의 실체를 인정할 것.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태풍에 기대 자신에 대한 결론을 내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 것. 사람이란 무릇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에 빗대 변명을 허락하는 잘못을 하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도 여전히 한계는 쓰라리다.
--- p.112

아무 생각 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인 결과가 이런 것이다. 어떤 노력을 해도 다시는 자연스러워 보일 수 없는 몸과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 영수증 더미. 길게 자국이 남은 흉터와 더불어 누가봐도 인공적인 색이 입혀진, 내 것이 아닌 가슴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용기를 내볼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나도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일 텐데 그들이 우리 사회의 다양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박탈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지 않고,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란 겪어봐야 쌓이는 마일리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세상이 다양해지고 그 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 여기고 있기에.
--- p.123

나는 조금 변했다. 흰 머리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입가의 팔자 주름은 웃지 않을 때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때로는 변하는 것이 아쉽다. 늙는 것은 추해지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것,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들이 빛바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걸 간직하려는 노력이란 게 필요한 모양이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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