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는 삶을 직시하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든, 괴로워도 바라봐야 한다. 도망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글로 만들려면 아주 오래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에세이는 용감한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생각이 가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을 뭐라고 부르든, 그것이 산문이든 수필이든 에세이든, 글에 담긴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팬으로서 그렇게 생각한다.
--- p.10
왜 모르는 누군가가 커튼을 걷는 뒷모습을 보는 게 좋았을까, 왜 냉장고에 있는 채소를 대충 썰어 넣은 수프가 그렇게 맛있어 보였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미지근한 물도, 청소도, 목욕도, 스트레칭도, 그릇 정리도, 전부 주문이었다. 그리고 결계였다. 오늘 나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외우는 주문이자, 나의 쉼터가 더 포근해지기를 바라며 만드는 작은 결계.
--- p.21
세상은 완벽하지 않은데 창문으로 보는 세상은 완벽하다. 신기한 일이다.
--- p.68
일상은 얼마나 떠내려가기 쉬운가. 무난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는 얼마나 힘든가. 어떤 사람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점점 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인생론〉이라는 노래를 쓴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어른이 되어가는 건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라는 문구를 잘도 넣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못 적을 것 같다. 지혜는 자동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상황은 복잡해지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매번 같은 레퍼토리가 민망해서 하소연하기도 좀 그렇다. 친구와 만나면 이 말만 반복한다. 다 그렇지 뭐. 그렇다고 화성으로 떠나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바람이 통하게 하려면,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고 밝은 곳을 보려면,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p.21~22
눈을 뜬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멋진 일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고 글을 읽으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 다다를 때 아, 하고 멈춘다. 더 나은 자신이 된다는 쾌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건 안전한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 내 인생이 주제가 된다면 다르다. 그것은 때때로 비참하고 잔혹하고 지치고 화가 나는 일이 된다. 더 나아가선 유약하고 비겁한 자신의 태도에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사방이 지뢰였다. 화가 난다. 그리고 지뢰는 내 안에도 있다. 부끄럽다. 그런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기운이 빠진다. 세상은 빨리 변하지 않을 것이고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걸 겪고 있는 나 자신도 사실은 그다지 괜찮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흐름은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눈을 뜨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렇게 간단히 적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간단한 일이 아니다.
--- p.132~133
오사카 나오미는 최근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고백했다. 우울증이 있는 그는 나약한 사람일까. 미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일어나던 2020년, 그는 유에스 오픈 경기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나왔다. 마스크에는 시위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 농구 경기나 미식축구 경기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나온 선수들이 있었다. 여럿이 모이면 마음이 강해진다. 어쩌면 팀 스포츠여서 용기를 내기 조금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니스는 개인 종목이기에 오사카 나오미는 코트 위에서 철저히 혼자였다. 그는 출전한 경기에서 전부 이겼다. 그래서 준비했던 일곱 개의, 각각 다른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마스크를 전부 쓸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의 영웅의 모습은 이렇다.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때로 무너져도, 계속 달려가는 사람.
--- p.142~143
예전에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열심히 살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용기가 있어서 죽는 게 아니다. 그만 얻어맞고 싶어서, 이제 다 그만두고 싶어서 내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인생이란, 길 한가운데에 샌드백처럼 서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제 이 자리에 그만 서 있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닐까. 성소수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이십대 여성 자살률이 전년 대비 43퍼센트 증가했다고 한다. 촘촘한 혐오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간다.
--- p.156
세상은 공짜로 바뀌지 않는다. 누군가는 지금도 가시밭길을 걷는다. 지뢰가 터진다. 우리는 같은 땅에 서 있다. 희망이 아주 작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막을 계속 걷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