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덜미와 얼굴에 생긴 붉은 반점과 하얀 거스러미, 건조함으로 피부가 온통 발작처럼 일어날 때 아이들은 내 물건조차 스치는 것을 싫어했다. 마치 병을 옮기는 고약한 바이러스 취급당하는 기분이었다. “옮기는 거 아니거든.” 내가 단호하게 말해도 아이들은 슬금슬금 피했다. 그렇다고 그렇게 슬퍼하지는 않았다. 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등 혼자 놀 수 있는 일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실은 끊임없는 자기 세뇌를 한 결과이다. 아이들의 그런 반응을 되도록 모른 척하려고 애쓴 결과물이기도 하다. 아이가 참 밝다는 말을 엄마도 나도 많이 들었다. 그 속뜻에는 ‘그런 몹쓸 병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가 있어요?’라는 반문이 들어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엄마는 내가 과장되게 밝은 척하려는 것도 알고 있다. 때론 척이라는 것도 나름 노력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노력이 먹힌 건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가 가장 우려한 것은 그런 분위기 속에 내가 집중적으로 시선을 받으며 대인기피증 내지 우울감을 앓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 p.17
“벼리야, 사실은 말이야.” 엄마는 상자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카메라를 내리고 말없이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엄마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서 긴장되었다. “이 집에 살던 열일곱 살 난 딸이 죽었단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드세게 쿵덕거렸다. “헉.” “오래전 일이야.” 엄마는 시효가 지난 일이니 그렇게 놀랄 것 없다는 뜻으로 덧붙였다. 그런 뒤 말없이 연신 상자를 쓰다듬었다. “허얼, 정말? 그걸 알고도 이 집을? 누구한테 들었어?” “이장님이.” “왜? 왜 죽었대?” 그 순간 왜 심장이 툭 내려앉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늘 속에 있던 세나의 얼굴이 훅 겹쳐왔다. 갑자기 세나의 안부가 걱정되었다. 이 집에서 죽은 열일곱 살 난 딸과 세나가 왜 동일시되는지 모르겠다. 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구두가 더욱 유난하게 보였다. “그런 것까지는 자세히 얘기 안 하고. 이장님이 이 집을 결정하는 데 문제가 되면 하지 말라고 하는데, 솔직히 얘기해주는 게 외려 문제가 안 될 것 같았어.” “엄마는 그런 게 문제가 안 돼?” 이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의 선득함을 잊을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아이, 그거하고는 다르잖아.” “그게 뭐가 문제 삼을 일이야? 엄마는 그래서 더 결정하기 쉬웠어.” --- p.39~40
너, 잠자리 시집보내기 놀이라는 거 알아? 태규를 보면서 그 놀이가 생각났어. 잠자리 꼬리를 자르고 그곳에 보릿대나 풀대를 넣어 날려 보내는 놀이야. 그게 잠자리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놀이 삼는 사람은 잠자리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런 모습을 보고 오히려 희열을 느끼거든.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대에 꿸 때도 목에서 노란 진물이 흐르는데 그게 피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하던 대로 하는 거지. 어렸을 때 그런 놀이를 싫어한 나를 아이들은 이상한 눈으로 봤어. 태규를 볼 때 꼭 그걸 보는 느낌이었어. 그간 못 봐서 그렇지 실은 더 심하게 태규를 놀잇감 삼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태규가 싫어하지 않겠냐고 소리 질렀어. 그 후부터야. 쓸데없이 아는 체했다고, 태규가 네 애인이냐고 하며 나를 타깃 삼았어. 내가 학교나 동네 어른들에게 고자질할까 봐 미리 단속하는 건지도 몰라, 일종의 으름장 같은 거지. 그러기만 해봐라, 뭐 이런 식이지. --- p.68
블로그에 ‘붉은 상자’ 코너를 만들어 상자를 여는 장면부터 그 속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찍어 올리며 사진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저기 푸른곰팡이가 핀 노란표지의 다이어리를 올렸다. 그 표지 위에는 검정색 글씨로 강여울이라는 이름이 흐릿하게 쓰여 있지만 번짐 처리했다. 그다음엔 피노키오 인형을 올렸다. 코가 몸에 비해 길게 솟아나온 피노키오 인형이다. 양 다리를 쭉 뻗고 주저앉은 채 낙망한 듯 머리가 한쪽으로 기운 피노키오 인형. 다른 물건에 눌린 탓인지 목이 기울어져 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마디 인형이다. 사진 아래, ‘지금은 주인 잃은 피노키오 인형’이라고썼다. 업로드하자마자 댓글이 올라왔다. 나무야나무야: 이거 고현 첫사랑 얘기랑 분위기가 너무 비슷한데요. 우연이겠죠ㅎㅎ --- p.109
마당으로 들어서자 어느 정도 가지치기가 되어 있어 길이 보였다. 더 이상 몸을 작게 만들어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아빠가 길을 내놓았다. 별목련나무의 꽃눈은 조금 더 부풀어 올랐고, 더욱 붉어진 단풍나무의 줄기 끝에는 이슬방울이 말갛게 맺혀 있다. 모과나무 둥치는 푸르스름한 빛을 더해가고 마당 수돗가 배나무도 어제와 다르게 꽃눈이 부풀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 하늘과 지붕 사이는 누르면 쑥 들어갈 것 같은 안개로 자욱했다. 나무들이 숨을 쉬며 뿜어내는 기운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상자 안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려다가 통째로 들고 뒤꼍 너럭바위로 향했다. 그런 나를 엄마 아빠가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뒤 베어낸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두텁게 쌓인 낙엽을 긁어내었다. 엄마가 뒤꼍 너럭바위에 파라솔을 펴놓고 의자를 놓았다. 거기서 점심을 먹기도, 엄마가 허리를 펴며 차를 마시기도 할 것이다. 엄마, 아빠가 새삼 고마웠다. 나의 안락한 의자와 파라솔이 되어준 것 같아서.
아토피를 앓고 있는 벼리는 치료를 위해 산골 학교 ‘이다학교’로 전학을 가고, 그곳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태규를 도와줬다가 나쁜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세나와 친해지게 된다. 벼리는 엄마의 눈에 띄어 산 은사리 폐가, 지붕이 내려앉은 작은 방을 정리하다가 붉은 무늬 상자를 발견한다. 세나와 함께 상자를 열어본 벼리는 다이어리와 시화집, 인형을 발견하고 상자의 주인이 이곳에 살았던 죽은 열일곱 살 ‘강여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장씩 다이어리를 읽어 내려간 벼리는 여울이 죽기 전 세나와 비슷한 일을 겪었음을 알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진 소문, 친구들의 외면, 아버지에게까지 외면당한 여울, ‘살고 싶지 않다’는 말로 끝나버린 일기장. 그런데 우연히 여울을 괴롭힌 소문의 진원이 라이징스타 ‘고현’임을 알게 된다. 벼리와 세나는 홀로 외로움 속에 삶을 끝낸 여울을 위해 행동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