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서 아이들은 서로 친구가 되었지만, 나는 늘 혼자였다. 본의 아니게 외톨이가 되는 일은 이미 일상이었지만 매번 창피하고 싫었다. 동시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 편히 있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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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서는 툭하면 앞자리부터 쭉 교과서 지문을 큰 소리로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내 순서가 다가올 때마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심란해졌다. 모두가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상황에서 우물쭈물 침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순서가 되면, 내 짝꿍도 듣기 힘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몫의 정해진 문단을 읽어 내려갔다. 어서 선생님이 “그만” 하고 다음 차례로 넘겨주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안 그래도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인데, 친구들 모두 귀 기울여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나는 이미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아이였고, 그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것이 늘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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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로운 얼음 소녀였다. 집만 벗어나면 얼굴을 포함한 온몸이 굳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굳었으니 웃는 일도 우는 일도 거의 없었다. 목소리를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무척 큰 노력이 필요했다.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안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편했다. 나를 쳐다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싫었고,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겁났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웠다. 언니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집 밖에만 나서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음쌍둥이가 되었다.
--- p.20
빨리 흘러가버리길 바라는 순간들의 연속. 하나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그 노래가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그런 순간순간들을 버티면서 하원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도 몇 시인지도 몰랐고, 얼마나 더 시간이 흘러야 집에 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시간은 결국 끝이 나긴 했다. 외로움, 서글픔, 당황스러움, 억울함 등의 온갖 감정들을 억누르고 무사히 사회생활을 마무리하면, 원래의 나로 돌아올 시간.
--- p.33
“엄마가 너네한테 신경도 제대로 못 써주는데, 셋 다 알아서 잘 자라줘서 고마워.”
엄마의 눈이 촉촉해졌다. 늘 씩씩했던 엄마의 그런 모습이 어색했던 우리 셋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애매하게 찌개만 바라봤다. 그날의 부대찌개는 참 맛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맵싸한 부대찌개 냄새를 맡으면 잘 자라줘서 고마워, 라고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제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힘든 일이 닥칠 때, 현실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혼자 되뇌는 엄마의 문장들.
너희를 믿는다.
잘 자라줘서 고마워.
그 말들이 내 삶에서 그 어떤 다른 자잘한 칭찬보다 더 큰 힘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p.75
“엄마!”
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아이는 활짝 웃는 밝은 얼굴로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아들의 주눅 들은 모습을 보리라고 각오했는데, 아이는 보란 듯이 미소를 만발한 채 이야기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빈이는 두 팔을 벌리고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처음 오는 장소에서 그렇게 자유로운 모습은 엄마인 나조차도 처음 보았다. 그 순간, 내 아이가 나의 예상보다 단단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하게 두근거릴 뻔하던 심장이 마침내 행복감에 잦아들었다. 운동장에 뛰어다니는 이 많은 아이들은, 낯선 장소에서 평범하게 적응해가는 일이 실로 얼마나 대단한 것임을 알까. 혹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라 해도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쓰며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 p.91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체육이었다. 지나치게 내성적인 아이였으니 체육을 싫어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체육 시간이 끔찍했던 이유는 수업 그 자체보다는 ‘체육 수업을 위해 운동장으로 나가는 시간’ 때문이었다. 가끔은 나를 챙겨서 같이 밖으로 나가는 아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 혼자였다. 둘 중에서 나는 후자인 편이 좋았다. 누군가 나에게 같이 나가자고 손을 잡으면 나는 늘 마지못해 끌려갔다. 혼자인 것이 더 편했다. 그러나 교실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며, 운동화를 갈아 신는 일이며, 운동장까지 나가는 일 모든 것이 곤욕이었다. 학교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뿐 아니라, 무엇을 하든 마치 근육이 굳어버린 듯 몸이 어색하게 움직여졌다.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일상이라면, 그 일상을 벗어난 모든 변수들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 p.93
지금 나는 한의원에서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프다. 침을 놓을 때 잔뜩 긴장하는 환자들, 불면증에 괴로운 환자들, 공황장애로 가슴이 시도 때도 없이 두근거리는 환자들, 우울증으로 자살 기도한 흔적이 있는 환자들, 이유를 알 수 없는 건선으로 매일 밤 고생하는 환자들, 산후 관절통에 시달려 육아하다가 울어버리는 환자들…… 그들 모두가 나이고, 또 나의 가족들이다.
침을 놓고, 한약을 처방하는 내게 “선생님, 저 이제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이 마음속 가득 차오른다. 용기를 내어 따라와주는 환자들에게, 그리고 한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용기를 내어준 나 자신에게 고맙다. 오늘도 우리는 같이, 서로를 치유한다. 나 역시 그렇게 치유되고 있다.
--- p.144
간혹 입을 꾹 닫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쌍둥이 딸들이 침묵하는 시기가 점점 길어지자 엄마는 당혹스러움을 가득 안은 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고 싶어 여기저기 해결책을 수소문도 해봤다고 했다. 엄마는 점점 걱정되었지만, 유치원 선생님들도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모두 괜찮아질 거라고만 했다. 엄마는 불안한 마음을 붙잡고 ‘극도로 내성적인 아이들’이라는 결론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두 자매가 이를 극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눈에는 우리에게서 특유의 불안감이나 예민함이 보이지 않았을 테고, 착실함과 온순함만이 보였을 테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하며 우리를 믿고 기다려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엄마의 희망이자, 믿고 싶은 소망이었으리라.
--- p.209
나는 상담사가 이끌어주는 대로 상상 속에서 어린 나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안쓰러운 아이. 머리부터 등줄기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어린 여진이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 조카들을 사랑으로 안아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주 작고 소중한 등줄기였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나는 어린아이답지 않았다. 모든 감정을 눌렀고 덤덤하게 넘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엔 그다지 큰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하지만 사실은 무척 울고 싶었던 것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을 애써 모르는 척했고,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은 몇 년간 쌓여 어른이 된 후에도 나의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린 나는,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