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이상적 자기와 당위적 자기가 있습니다. ‘나는 내 엄마와 다르게 아이를 키울 거야’라는 부모를 향한 원망과 서운함에서 비롯한 다정하고 수용적인 자기, ‘나는 공부를 못해 힘들었으니 아이는 잘 가르쳐서 성공시킬 거야’라는 이상적 자기, ‘엄마라면 강해야 하고 모든 것을 수용해야 해’라는 당위적 자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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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하느라 흘린 땀을 채 씻지도 못하고, 초췌한 맨얼굴에 기름진 머리를 질끈 묶은 상태, 가슴을 내놓기도 하고, 소변 줄을 가릴 수 없는 상태. 거기에 대형 패드를 해도 새 버리는 오로로 임부복이 물들었습니다. 제 몸에서 피 냄새와 땀 냄새,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수치, 수치심이 감돕니다. 고생했다고, 애썼다고, 자랑스럽다고 들은 것 같은데 부족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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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낳았는데 내가 왜 이러지? 행복해야 하는 건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호르몬의 영향일까? 뭔가 이상해…’ 문득, 출산하고 조리원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면 전화하라던 나이 지긋하신 육아 선배가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말할 사람이 엄청나게 필요해지는 시간이긴 하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전화할 수는 없었습니다. 날것의 오열을 쏟아내면서도 그 울음의 이유를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 p.45
비교는 육아 수행뿐 아니라 자신감이나 모성이라는 측정할 수 없는 개념에 대해서도 시작됩니다. 결정을 잘 내리는 결단력을 비교하고, 똑같이 잠을 못 자고도 활기찬 체력을 비교하고, 남편도 비교합니다. 내 남편은 밤 10시에 퇴근하는데 저 엄마는 늘 남편과 붙어 있는 것 같고, 나는 저렴한 기저귀를 쓰는데 저 엄마는 오가닉 기저귀만 쓰는 걸 보니 질투가 납니다. 그래도 하지 않았으면 좋은 것, 아기도 비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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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에서는 말합니다. ‘이만하면 충분한 엄마 노릇(good enough mothering)’이라고. 책에 기술된 그 ‘이만하면’이란, 충분히 아이를 먹이고 재우며, 불안할 때 위로와 공감을 해주는 정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충분히 먹였는지 알 수 없고, 졸려 하는데 잘 안 재워지고, 아이가 불안할 때 위로와 공감보단 내가 먼저 불안해서 위로가 필요한 초보 엄마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 p.79
‘나는 전적으로 좋기만 한 엄마도 아니고,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엄마도 될 수 없다. 내 안에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강한 면과 약한 면이 공존한다’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나까지 끌어안아야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분석심리학과도 일치하는 맥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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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가 사용하는 기술 중에는 ‘자기개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담자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개인 경험을 상담사가 개방하는 것으로 이는 의외로 높은 효과를 보입니다. 깊은 통찰로 이끌 수 있는 기술은 아니지만, 우선 내담자에게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보편성을 깨닫게 하고 위로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한 가지 자기개방을 해주셨습니다. 아이가 신생아였을 때 아내와 어떻게 키웠는지를 이야기하시자, 저는 비난이나 제재 없이 실컷 울 수 있었습니다.
--- p.106
그러므로 제 산후 우울은 호르몬 변화에 수면 부족, 비타민D 부족이라는 일차적인 생리적 이유와 더불어, 출산 과정에서 여성성을 상실한 듯한 수치심, 남편과의 친밀한 시간과 개인의 자유를 잃은 상실감,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구나’ 하는 충격과 감사함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후회, 앞으로도 이런 나날이 지속할 것 같은 두려움, 엄마로서 잘하고 있는지에 관한 불안, 한 아이를 24시간 평생 책임진다는 부담감, 우울감이 증폭시킨 부정적 사고와 모성이 부족한 엄마라는 죄책감과 자괴감 등이 한꺼번에 덮쳐온 파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 p.124
육아는 더없는 고립을 경험하게 하여 소속감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잘해도 본전이고,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해 욕구를 읽어내야 하니 초보 엄마는 유능감을 경험하기도 어렵습니다. 아기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아기의 욕구에 맞춰 행동해야 하므로 자율성의 욕구 또한 충족이 어렵습니다. 아기가 잠들면 늦게까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핸드폰을 보거나 영화를 보고, 먹고 싶었던 음식을 먹는 것은 바로 이 자율성 욕구 충족을 위한 자연스러운 시도일 것입니다.
--- p.158~159
엘리스에 따르면, 비합리적 신념은 원하지 않는 정서적, 행동적 결과에 대해서 사람들을 더욱 상처받기 쉽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반드시 언제나 다정하고 행복한 엄마여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목표가 성취되지 않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은 정서적 결과인 우울증을 경험하고 부정적인 자기 평가에 몰두하며 사회적인 철회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p.199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저는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목표,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최댓값마저 잃은 기분입니다. 내가 육아에 매진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경력을 쌓고, 더 배우고 승진할 거로 생각하면 나는 그만큼까지는 성장할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하게 됩니다. 존재감마저 잃을 것 같아 불안이 요동칩니다.
--- p.226
외부 적응은 ‘일상생활에의 적응’으로 대부분의 엄마가 이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젖 물리기에 한창이니까요. 내부 적응은 ‘자아의 감각에의 적응’입니다. 우울감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부분입니다. 영적 적응은 ‘상실한 개인의 적응’으로 가치관, 세상을 가정하는 방안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입니다.
--- p.230
우선 엄마가 되지 않은 나이가 찬 여성은 엄마되기를 암묵적으로든 직설적으로든 요구받습니다. 가임기 여성의 수를 지역별로 표시한 출산 지도가 미혼의 여성을 당연히 결혼할 여성으로 기대해 반영했다며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이토록 사회는 결혼한 여성은 당연히 언젠가 엄마가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 p.239
나 스스로, 타인이 나에게, 내가 타인에게 모든 양육의 의무를 오직 ‘엄마’에게 냅다 뒤집어씌우는 게 아니라, 엄마도 한 사람임을, 혼자서는 결코 질 좋은 양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짐을 나누고 부족한 부분을 비난하는 손길을 거두어야 합니다.
--- p.243
보육 시설, 보육의 질, 안전, 치안, 여성의 경력, 노동 시간, 회식과 야근 문화, 집값 등 육아와 출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렇게나 많습니다. 산후 우울도, 육아 우울도 결코 엄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