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의 비명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고통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며, 인생이라는 흥미진진한 비극의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스스로 영웅입네 하고 나설 사람은 천박한 사람이나 얼간이뿐이라는 듯이. ---pp.10~11
“아, 자넨 앉아서 하는 게 고작 묻는 일뿐인가! 그냥 뭣에 홀린 게지, 그게 다야. 방앗간 여편네 이야기 알지? 그 여편네 엉덩이를 보고 글을 깨우치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 여편네의 엉덩이가 바로 인간의 이성이란 말일세.” 지금까지 이성에 대한 수많은 정의를 읽어봤지만 이처럼 명쾌한 설명은 없었다. 그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제 나는 이 새로운 길동무를 아주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얼굴은 벌레 먹은 나무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p.19
갑자기 그의 몸이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그대로 날아오를 듯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육신에 깃든 영혼이 그의 늙은 몸뚱이를 데리고 어둠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오르려 안달하는 것 같았다. 공중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땅에 풀썩 떨어진 몸을 영혼은 재차 뒤흔들어 깨우며 다시 한 번 힘차게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불쌍한 육신은 이내 숨을 헐떡이며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p.104
바로 그 순간, 한 여인이 탐스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검은 치마를 무릎까지 들어 올린 채 달려갔다.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 때문에 그녀의 적당히 둥그스름한 몸매는 탄탄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저런 맹수를 보았나! 나는 생각했다. 그 여자는 내게 나긋나긋하고도 위험한, 남자를 잡아먹고도 남을 여자로 보였다. 여인은 순간 고개를 돌려 숨을 멎게 하는 눈빛으로 카페 안을 흘끔 바라보았다. ---p.141
나는 달빛을 받은 조르바를 바라보며 그가 얼마나 명랑하고 단순하게 주위 세계를 받아들이는지, 그의 영혼과 몸이 얼마나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지 감탄했다. 세상 만물 ? 여자들, 빵, 물, 고기, 잠 ? 이 그의 살과 기꺼이 하나가 되어 조르바라는 존재를 이룬다. 우주와 한 인간 간의 그토록 친밀한 조화를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p.193
“내 말이 우스운가 보군, 보스, 하지만 웃을 것까진 없네. 인간이 자유를 되찾는 길은 그것뿐이거든! 내 말 명심하게. 배가 터질 때까지 처넣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금욕도 소용없지. 악마보다 한 수 위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악마를 이기겠는가?” ---p.281
그날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영혼에도 살이 있음을 깨달았다. 육체의 살보다 불붙기 쉬우며 더 투명하고 더 자유로울지는 모르나 어쨌든 살은 살이었다. 더 나아가 살 또한 영혼이다. 조금은 부풀어 오르고, 세월의 무게에 지쳐 짓눌렸을지는 몰라도. ---p.342
우리는 잔을 부딪치고 포도주를 음미했다. 고급 크레타 포도주는 토끼의 피처럼 진한 붉은빛을 띠었다. 포도주를 마시면 마치 대지의 피와 일체가 되어 괴물로 변해버리는 기분이었다. 핏줄에는 힘이 울근불근 솟았으며 심장에서는 선함이 넘쳐흘렀다. 양처럼 순한 사람도 사자로 변하게 하는 포도주였다. 삶의 옹색함을 잊어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과 야수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며 우주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p.411
그가 공중으로 뛰어오르자 그의 팔과 발에 날개가 솟아난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뛰어오르는 그는 마치 반란을 지휘하는 대천사 같았다. 그의 춤은 반항과 고집으로 가득했다. 마치 하늘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저를 어찌하시겠습니까, 주여? 저를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십니다. 좋아요, 죽이십시오. 상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을 다 풀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습니다. 춤도 마음껏 췄으니…… 이제 당신은 필요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