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어엉 기, 왕.”
“죽는다!”
“왜, 킹 좋잖아?”
나는 태민이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는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왔다. 이름만 부르면 ‘기완’, 괜찮은데 성까지 붙여서 마지막 발음을 살짝 뭉개면 ‘성기 왕’.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자애들 앞에서 그렇게 부를 땐 더더욱. 어떻게 한 인생의 이름을 앞뒤 맞춰 볼 생각도 안 하고 막 지었는지 모르겠다. 개명이라도 확 해 버리고 싶지만 땅 부자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라서 절대, 절대 안 된단다. 훗날 유산 상속을 위해, 작명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게 아빠의 지론이다.
“야, 오늘 너희 가게 가도 돼?”
“안 돼.”
“지난번에 너희 아빠가 와도 된다고 했잖아. 한 시간만, 응?”
“그럼 청소 콜?”
“콜.”
기말고사도 끝났고 진도도 다 빼서 영화 보다가 급식만 먹고 하교하기 때문에 아직 한 시 반밖에 안 됐다. 학교 밖으로 나오니 진눈깨비가 내린 통에 도로가 질척했다. 태민이가 버스비 아깝다고 걸어가자고 했지만 나는 귀찮다고 한 정류장 거리인 가게까지 버스를 타자고 했다.
“와우, 역시 금수저. 돈을 아주 길바닥에 뿌리고 다니는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 아빠가 가게를 두 개 하면 금수저냐? 하긴 나도 어릴 땐 슈퍼나 문방구 집 애들이 부럽긴 했다. 태민이 녀석은 버스에서 내려 가게로 걸어가며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p.9~10
“성기완, 빨리 나와!”
잠결에 들어도 목소리의 톤이 달랐다. 난 죽었다. 심장이 덜덜 하는 순간, 눈이 동그래진 엄마가 먼저 내 방으로 뛰어들었다.
“아들, 무슨 일이야. 아빠 왜 그래?”
나는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아빠가 뻑 하면 나, 가게 일 시키잖아. 그래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아빠를 안 도우면 누가 도와? 그리고 그깟 가게 일 좀 돕는 것 갖고 뭘 그래?”
엄마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당연하다는 듯 퍼부었다.
“그깟 일? 아, 됐어. 나가.”
“얘 좀 봐, 왜 엄마한테 아침부터 짜증이니?”
“됐다고!”
진짜, 내 편은 하나도 없고 주위에 나를 향해 쏘아 대는 화살들만 빗발친다. 어쨌거나 상황을 누그러뜨리는 게 급선무다. 일단 다짐부터 받아 두자.
“엄마, 아빠가 뭐라 하면 옆에서 딴소리하지 마.”
“알았어, 빨리 나오기나 해.”
나는 미리 인상을 북, 그으며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멀거니 쳐다보았다.
“성기완, 아빠 괴롭다. 영업정지 20일은 나올 거다. 안 그래도 요즘 단속 강화돼서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바로 경고 때리는데. 장소, 시간까지 다 찍어서 보냈단다. 행정처분 받으면 바로 이의 신청해야 하니까, 넌 그 녀석 만나서 거짓 제보한 경위부터 알아 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
“넌 아빠 말씀에 어, 가 뭐야?”
엄마가 냉큼 끼어들어 핀잔을 주고는 아빠한테 물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웬 영업정지?”
“몰라, 얘한테 물어봐.”
내가 입을 열 것 같지 않자, 엄마가 바로 교훈 모드로 돌입했다.
“아들, 생각해 봐라, 아빠가 왜 너한테 일을 시키는지. 다 일찍부터 사업 경험 쌓으라고 그러는 거야. 엄마도 살아 보니 경험이 제일 중요하더라. 뭐든 경험을 쌓은 사람이 실전에도 강한 법이거든.”
아직 난, 중딩이라고! 공부하기도 벅찬데, 무슨 사업 경험씩이나. 열불이 올랐지만 억지로 눌렀다.--- p.41~43
드르륵, 아빠 전화다.
“아들, 노래방 깨끗이 청소하고 전기 차단기 내려. 문단속 잘 하고. 낼부터 집합금지래. 당분간 영업하지 말라고 명령이 내려왔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누가 그런 명령을 해? 우리 가겐데.”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정부에서 내린 명령이야. 조금 있으면 문에다 집합금지 명령서 붙이러 온대.”
“그럼 피시방도?”
“어.”
뜬금없는 소리에 힘이 쭉 빠졌다. 아빠 목소리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지연이가 물었다.
“왜?”
“이제 가게 못 한대. 집합금지래. 너희 가게도?”
“몰라, 우리 엄마는 아무 말 없었는데.”
지연이가 인터넷을 검색했다.
“아, 또 노래방에서 확진자 나왔구나. 아니다. 노래방, 피시방, 식당, 여튼 사람들 모이는 곳은 싹 다 금지네. 금지하라면 해야지 뭐.”
나는 지금 심각한데, 얘는 딴소리를 하고 있다. 자기네는 가게를 한 개만 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성기완, 참 옹졸하다. 한 개든 두 개든 가게 문 닫으면 누구나 힘들다고! 부끄러움을 떨치려고 고개를 흔드는데,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던 지연이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앗싸, 학원도 오지 말래. 코로나가 내 독서시간을 지켜 주는구나. 아, 뭐야. 인터넷으로 진도 나갈 테니까 시간 맞춰 들어오라고? 힝, 좋다가 말았네.”
지연이가 혀를 쏙, 빼물고 동그랗게 빛나는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심각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지연이의 이런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손이 나갔다. 지연이가 깜짝 놀라 볼에 닿는 내 손을 쳐내고 머리통을 콕 쥐어박았다. 급 무안해진 나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지연아, 넌 너무 철벽이야.”
“성기완, 매를 벌어라, 매를 벌어!”
지연이가 청양고추보다 맵게 톡 쏘고는 발딱 일어나 계단을 올라갔다. 아뿔사, 또 실수했다. 나, 왜 이러니? 후회와 자책 속에 가게를 정리한 후, 전기 차단기를 내렸다. 조용히 암흑 속에 갇히는 노래방을 한번 뒤돌아보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p.87~88
끝이 나지 않을 듯 계속되던 지루한 장마가 뭔 일을 낼 줄 알았다. 일찍 가게에 나간 아빠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기완아! 아빠가 빨리 가게로 오래. 노래방에 물이 차서 야단났나 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가게에 물이 왜 차?”
“몰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엄마가 두 주먹을 쥐고 바르르 떨었다.
“물이 찼으면 퍼내면 되지, 왜 나보고 오래. 엄마도 같이 갈 거야?”
“어쩐다니….”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한 엄마를 뒤로하고 노래방으로 갔다.
“야, 빨리빨리!”
가게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노래방 계단에 한 발을 걸친 지연이가 고무장갑 낀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야, 이런 상황에 굼벵이같이 느릿느릿… 빨랑 내려가 봐!”
지연이가 호들갑스럽게 소리치며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입으로 불었다. 계단을 내려가니 이미 가게는 물바다였다.
“자, 이쪽으로 쓸어!”
아빠가 플라스틱 빗자루를 내 앞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고개를 빼고 안을 들여다보니 지연이 엄마 아빠와 1층 헤어숍 아줌마까지 비질을 하고 쓰레받기로 물을 퍼내느라 분주했다. 비로소 상황이 파악되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안에서 나오는 물을 양동이에 쓸어 담고 계단 위로 올라와 길에 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 p.106~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