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는 초나라 고현(苦縣) 여향(?b鄕) 곡인리(曲仁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며,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으니,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말한 사람은 이미 뼈마디까지 모두 썩어 버렸고 다만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라오. 또한 군자가 때를 잘 만나면 마차를 타는 귀하신 몸이 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대강이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뿐이라오. 내가 들으니,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감추어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듯하고, 군자는 덕(德)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서도 겉보기에는 마치 어수룩하게 보인다고 했다오. 그대도 교만과 욕심 그리고 그럴듯한 자태와 잡념을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런 것은 그대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오. 내가 그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라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어떻게 날 수 있는지, 물고기가 어떻게 잘 헤엄치는지, 짐승이 어떻게 잘 달리는지를 알고 있다. 달리는 놈은 밧줄로, 헤엄치는 놈은 그물로, 나는 놈은 주살로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龍)은 어떻게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만나 본 노자는 마치 용과 같은 인물이었다.”--- p.4
죽간본은 현행 통용본과 장을 나눈 순서가 달라서 유교의 영향을 받은 동궁지사가 『노자』를 개조한 발췌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고, 혹은 그 자체로 완정(完定)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두 견해에 대해 모두 회의적이다. 갑본과 죽간본 사이에는 150~200년의 차이가 있는데, 통행본의 체계로 보면 총 49개의 장, 즉 전체 분량의 5분의 3이 죽간본에서 갑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늘어났다. 갑본의 필사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장을 늘려가며 원저를 5분의 3이나 덧붙였을까? 통행본 『노자』 1장을 위시하여 노자를 도가의 원조가 되게 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들이 통행본에는 보이나 죽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본 『노자』는 죽간본보다 많은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즉 죽간본은 원본 『노자』의 단편이라는 것이다. 갑본 등의 필사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하여 원본 『노자』에 보충 설명을 덧붙이거나 주요 개념어를 바꾸는 방식으로 개조했었을 것이다.--- p.11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항상 그러한 도(常道)’가 아니며,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으면 ‘항상 그러한 이름(常名)’이 아니다. 무(無名)는 천지의 시작이며, 유(有名)는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항상 그러한 무(常無)’를 희구하여 도의 오묘함(妙)을 관조하고, ‘항상 그러한 유(常有)’를 희구하여 도가 나타난 현상(?)을 관조한다. 이 양자는 같이 나와서 이름을 달리하니 같이 그윽하다고 한다. 그윽하고 또 그윽하니 온갖 신묘한 작용이 나오는 문이다.--- p.28
최상의 덕은 덕스럽지 않으니, 그러므로 오히려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스러움을 잃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없다. 최상의 덕은 인위적인 작위함이 없으며,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낮은 덕은 인위적인 작위함도 있으며,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진다. 최상의 인은 인위적으로 작위하지만,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은 아니며, 최상의 의는 인위적으로 작위하면서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지며, 최상의 예는 작위하면서 다른 사람이 호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잡아당긴다. 그러므로 덕을 상실한 이후에 덕이 있게 되었고, 덕을 상실한 이후에 인이 있게 되었고, 인을 상실한 이후에 의가 있게 되었고, 의를 상실한 이후에 예가 강요되었다. 대저 예라는 것은 충과 신이 엷어진 것이며 어지러움의 머리며, 미리 아는 것(지혜)은 도의 헛된 꽃이며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충과 신이 두터운 곳에 처하고, 그 엷음에 기거하지 않으며, 도의 열매에 처하지 그 헛된 꽃에 기거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p.47
이제 도에 대한 관조, 즉 궁극자를 체득하여 궁극자와 하나가 된 성인(聖人)은 어떠한 삶을 영위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서양철학의 전형적 패러다임을 나타내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참조해보자. 만물의 존재 근원이자 인식 근거인 태양을 직관함으로써 철학적 인식을 성취한 철학자는 자신의 변화로 인해 스스로 행복함을 느끼지만, 자신의 행복에도 불구하고 동굴 속의 수인(囚人)들에 대한 연민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동굴로 내려간다. 그렇지만 그는 어둠에 익숙한 수인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고, 결국 그들의 결박을 풀어주고 탈출을 시도하게 한다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노자는 도를 관조한 성인을 플라톤처럼 결코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노자가 성인의 행위를 마지못해 억지로 표현한 몇몇 구절을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성인은 되돌아오는 도의 작용, 항상 그러한 덕 혹은 현묘한 덕을 채득하여 실천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의 삶은 유약한 삶으로 나타난다.
---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