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운동이 ‘0’에서 ‘1’을 더해가는 일이라고 치면 서핑은 ‘0’에서 ‘0.1’로 겨우 갔다가 ‘-3’으로 굴러떨어지는 일 같다. 근데 그 ‘0.1’이 미치도록 좋아서, 고작 파도 하나 타려고 몇 시간 동안 물살을 버티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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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은 하면 할수록 ‘파도타기’라는 말로는 대체되지 않는 포괄적 의미로 다가온다. 서핑을 삶의 큰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난 뒤 얼굴과 표정이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서퍼라고 하면 떠올리는 외모, 가령 까만 피부나 타투, 자유롭고 개방적인 태도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눈빛에 있다. 사람의 눈에도 윤슬이 인다는 걸 서핑을 하며 처음으로 알게 됐다. 서퍼들의 눈에 바다가 스민 걸까, 혹은 다른 무언가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해준 것일까. 나는 자주 그들에게서 맑은 눈빛을 본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행복하다 말한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며 미소 짓는다. 그 표정이 사뭇 생경하다 여기면서도 가끔 서핑을 하고 난 뒤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을 볼 때면 나도 그들과 같은 듯해 한 번 더 웃게 된다.
--- pp.26-27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크기는 달라서 이토록 애먼 노력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나처럼 좋아하는 것을 성취하고픈 마음보다 장애물들이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나름의 단계를 시도하면서 이제는 큰 파도에 도전하지 못해서 느끼는 좌절감보다 어떻게든 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는 기쁨을 더 크게 느낄 줄 알게 됐다(이 글이 부디 비슷한 이유로 서핑을 망설였던 나 같은 사람에게 닿아서, 장벽 너머에 있는 값진 마음들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46
어른이 되면 단단해진다. 어른은 잘 울지 않기 때문이다. 잘 웃지 않기 때문이다. 단단함을 얻은 대신 우리는 오만하고, 편견으로 가득해진다. 반면 아이는 보드랍고 연약하다. 우리는 대개 이 연약함을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지만, 연약함이란 사실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음이고 무엇으로든 나아갈 수 있음이다. 그러니 연약함은 모든 존재를 품을 수 있는 상태다. 기쁨, 슬픔, 무력함, 환희…. 연약함을 보듬어 잘 간직한 어른이 비로소 시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 pp.27-28
125분의 1초의 셔터스피드로 피사체를 포착하면서 살아 있다고 느끼는 감각과 내 신체가 정교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느끼는 감각은 꽤 비슷하다. 수없이 반복해온 습작들이 모여 결국 작품으로 완성되듯 매일 땀 흘리며 반복한 동작들이 승리, 또는 승리에 비견되는 환희로 치환된다.
--- p.58
사실 파도가 좋고 안 좋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늘 서핑을 했나 안 했나가 중요할 뿐. 파도가 좋으면 좋은 대로 즐겁게 서핑할 것이고, 파도가 나쁘면 또 나쁜 대로 공부가 될 것이다. 나는 종종 파도가 없는 날에도 서프보드를 들고 바다에 간다. 패들링 연습을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냥 바다에서 노는 게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가끔 파도가 아주 없는 줄 알았는데 깜짝 파도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땐 정말 감사하고 기분이 좋다. 내가 이렇게나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나 싶어질 정도다. 그저 재미 삼아 하는 운동이라기에는 내 삶을 너무나 크게 뒤흔들고,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에는 아드레날린으로 나를 너무나 쉽게 휘두르는, 서핑은 너무나 까탈스러운 상대다. 그러나 무엇이어도 좋고 무엇이 아니어도 좋다. 언제라도 좋으니 그저, 나는 바다에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나의 바다에는 늘, 오래도록 서핑이 있었으면 좋겠다.
--- pp.68-69
사이드라이딩을 하는 동안 용기를 내어 손을 뻗고 파도의 표면을 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촉감은 무척 생생했다. 이 세상에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란 ‘아름답다’ 라거나 ‘짜릿하다’ 같은 형용사가 아닌 ‘있다’, ‘보다’, ‘느끼다’ 같은 동사로 온다. 그러니 우리는 자꾸 움직여야 한다. 우울이나 불행에 가만히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저 행복을 따라잡기 위해. 그렇게 어떻게든 움직일 때,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작동할 때, 비로소 진실로 살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pp.105-106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먼 북소리』에 ‘월드 엔드(세상의 끝’ 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저마다 세상의 경계가 다르다는 그의 노련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가 확장해온 세계를 생각한다. 허술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있듯, 아직 빈곤하기 짝이 없지만 나의 세계 하나쯤은 그렇대도 좋을 것이다. 오늘 내 세계의 끝엔 붉게 저무는 해가 있고 사막이 있고 푸른 눈을 한 나의 친구들이 있다. 서핑 한번 하려고 이 먼 아프리카까지 온 나도 신기하지만, 검은 눈을 한 이방인을 이토록 금세 친구로 맞는 이들도 신기한 노릇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우마르는 콧노래를 부른다. 오래전 점성술사가 해준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여행하며 전생의 친구들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잠시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 p.108
내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 역시 희망이란 이름의 이불이었다. 가난은 자신의 가능성을 걷어차게 하고 무기력함을 자꾸 주입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내게도 그 무력감이 꽤 오래 있었고, 시간이 지나 언젠가 그 모든 걸 떨칠 수 있게 된 건 꿈과 희망 덕분이었다. 그것은 당장의 힘든 오늘이 아니라 괜찮을지도 모르는 내일과 먼 미래를 내 것이라 믿게 하고 노력하게 만들었다. 꿈과 희망, 격려. 비록 아주 많은 걸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삶에 이 세 가지가 없었다면 나 역시 너무 쉽게 많은 것들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스포츠가 좋다. 이토록 멋진 이야기가 어딘가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소년 소녀에게 닿아서 꿈을 꾸게 하니까. 내 삶에서 대부분의 영감이 스포츠에서 비롯되는 이유다. 그곳엔 반드시 어제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 pp.129-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