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말소리, 그 흥미로운 세계를 향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의 귀에는 많은 소리들이 들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자판 두드리는 소리, 마우스 딸깍거리는 소리, 이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음, 연구실 밖에서 들리는 계단 오르내리는 발자국 소리. 아마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더 많은 소리들이 들릴 것이다. 바람 소리, 휴대 전화 울리는 소리, 누군가의 웃음소리, 자동차 엔진 소리 등등.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소리들을 들으며 살아간다. 이 많은 소리들 중에서 앞으로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관심을 두고 탐구해 보려고 하는 소리는 인간이 인간의 언어에서 사용하는 소리, 즉 말소리다.
어떤 것을 탐구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지금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인 말소리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일이다. 즉, 말소리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림으로써 어떤 소리가 말소리이고 어떤 소리가 말소리가 아닌지 가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 그럼 말소리가 무엇인지, 그 정의부터 알아보자.
1.1 말소리란 무엇인가?
‘말소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어떤 소리가 말소리고 어떤 소리가 말소리가 아닌지를 판단한다. 우리가 이런 판단을 내리는 근거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 우리는 강아지 짖는 소리나 천둥 치는 소리를 말소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또, 책상 치는 소리나 손뼉 치는 소리, 뭔가 좋은 생각이 났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와 장지를 튕기면서 내는 ‘딱’ 소리를 두고 말소리라고 판단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일까?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조금 달리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왜, 어떤 근거로 우리는 앞서 나열한 소리들이 말소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였는가?
우리가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강아지 짖는 소리나 천둥 치는 소리를 말소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소리들이 인간이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소리라는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인간이 만들어 낸 소리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책상 치는 소리나 손뼉 치는 소리, 뭔가 좋은 생각이 났을 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와 장지를 튕기면서 내는 ‘딱’ 소리는 어떤가? 이 소리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소리임이 분명하지만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서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니므로 말소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말소리라고 판단되는 소리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서 만들어 낸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인간이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 만들어 낸 모든 소리가 지금 우리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말소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코 고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재채기 소리나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입맛 다시는 소리, 코 훌쩍이는 소리들을 생각해 보자. 이 소리들도 모두 인간이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서 만들어 낸 소리들이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말소리가 아니라 단순한 소음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소리들은 언어학적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떤 소리가 말소리의 범주에 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 산출되어야 하고, 또 언어학적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럼, ‘언어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때 우리는 언어학적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일까? 언어학적 의미를 갖는 소리란 쉽게 말하면 단어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소리를 말한다. 즉, 어떤 소리가 어떤 언어에서 언어학적 의미를 가지려면 그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 중에 해당 소리를 포함하는 단어가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앞서 얘기했던 입맛 다시는 소리를 생각해 보자. 이 소리는 언어학적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입맛 다시는 소리는 맥락에 따라서 ‘먹고 싶다’는 의미를 가지고 사용될 수 있다. ‘먹고 싶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입맛 다시는 소리가 ‘언어학적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입맛 다시는 소리의 ‘먹고 싶다’는 의미는 언어학적 의미가 아니라 비언어학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만약 입맛 다시는 소리가 언어학적 의미를 가지려면 이 소리가 단독으로 혹은 다른 소리들과 어울려서 단어를 만들어 내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포함된 단어를 언어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단어를 말할 때마다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야만 한다. 하지만 입맛 다시는 소리가 들어간 단어를 가진 언어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입맛 다시는 소리는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해 만들어진 소리이기는 하지만 말소리의 범주에는 속할 수 없다. 코 훌쩍이는 소리, 이 가는 소리, 재채기 소리, 기침 소리, 코 푸는 소리, 코 고는 소리 등도 모두 같은 이유로 말소리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그런데 언어마다 단어를 구성하는 소리들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가’ 언어의 말소리가 ‘나’ 언어에서는 말소리가 아닐 수도 있고, 반대로 ‘가’ 언어에서는 말소리가 아닌 소리가 ‘나’ 언어에서는 말소리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혀 차는 소리를 생각해 보자. 이 소리는 아프리카의 많은 언어에서 말소리로 존재한다. 즉, 단어를 만드는 데 혀 차는 소리가 사용되기 때문에 이 언어들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혀 차는 소리가 들어간 단어들을 찾을 수 있다. 반면에 한국어나 중국어, 영어, 일본어, 불어 등에서는 이 혀 차는 소리가 단독으로 혹은 다른 소리들과 어울려 단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일이 없다. 즉, 한국어를 비롯한 중국어, 영어, 일본어, 불어 등에서 혀 차는 소리는 언어학적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말소리에 속하지 못한다.
혀 차는 소리는 많은 언어에서 언어학적 의미를 갖지는 못하지만 비언어학적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혀 차는 소리는 ‘측은하다, 불쌍하다, 못마땅하다’와 같은 언어학적 표현 대신에 그 의미를 비언어학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된다. 한국어에서 혀 차는 소리는, 발음 기관을 사용하여 내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좋은 생각이 났을 때 무릎을 치거나 엄지와 장지를 튕기면서 내는 ‘딱’ 소리처럼 비언어학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하등 차이가 없다.
이렇게 말소리는 ‘인간의 발음 기관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언어학적 의미를 가진 소리’라고 정의될 수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