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것은 ‘바이러스의 성질’이 아니라, ‘바이러스의 표상이 지닌 성 질’입니다. 우리는 바이러스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둘 수 있다는 거죠. 이처럼 바이러스를 방치하면 일정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 결과가 마 음에 들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행동 을 강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인간성 그 자체 가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행동의 동기화에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심리적인 설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많은 나라와 엄청난 수의 사람이 바이러 스로 인해 개인과 사회 전체가 떠안아야 하는 리스크를 과대평가하는 나라도 많고, 그런 사람 도 엄청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 pp.23~24
즉 윤리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도 절대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합니다. 한국의 윤 리가 중국의 윤리와 달라서는 안 됩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윤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윤리는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입니다.
--- p.38
미국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식 레스토랑을 ‘한국의 레스토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 지만 그곳은 한국의 레스토랑이 아니잖아요. 중국인이나 태국인 등 한국인이 아닌 요리사가 있습니다. 또 설사 셰프가 한국인이더라도 한식 ‘같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 다. 그럼에도 미국 사람들은 한식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다문화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멕시코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는 진정한 의미의 멕시코 요리가 없습니다. 미국에 있는 것은 멕시코 요리 같은 음식이지, 진짜 본고장의 음식이 아닙니다. 이처럼 미국인은 문화적으로 이 질적인 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에는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 히려 그들은 다양성에 대단히 약합니다.
--- pp.59~60
중국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시도 때도 없이 지적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 국과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를 통해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 이 지금 우리가 중국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지향하는 모델이 목표로 삼는 것은 상대의 입장을 가능한 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렇 다고 해서 상대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것이야말로 윤리를 실천한다는 것의 기본이며, 대화를 지향하는 모델의 목표입니다.
--- pp.142~143
메르켈이 총리에 취임한 뒤로 독일은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에 대한 대응으로 원자력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고는 일본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인류가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사고를 경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이 두 번 다시”가 아니라 “인 류가 두 번 다시”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독일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라는 것이죠. 그 녀 자신이 이 분야의 전문가인데도 말입니다. 메르켈은 이론물리학자입니다. 원자력을 지지하는 물리학자는 대단히 많지만, 메르켈은 지지 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처사입니다. 난민 위기라든지 동성 결혼에도 같은 자세로 대응했습 니다. 동성 결혼에 대해서 그녀는 개인적으로는 반대한다는 점을 확실히 표명하면서도 이것을 합법화했습니다.
--- p.159
제가 말하는 것은 본래의 ‘나 자신’이 있고, 소셜 미디어에는 ‘뒤틀린 나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소셜 미디어가 사람에게 본인이 바라지 않는 자신을 밀어붙인다, 혹 은 강요한다는 얘기죠. 게다가 그 프로세스가 불투명합니다.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새로 운 정체성(아이덴티티)을 강매해 큰돈을 벌고 있습니다.
--- p.174
21세기는 윤리자본주의의 시대입니다. 제가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캐치프레이즈는 이런 겁니 다. “세계에서 최초로 지속 가능하며, 윤리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든 나라가 21세기에 가장 부유한 초강대국이 될 것이다.”
--- p.216
“인생의 의미란?” 그런 질문을 종종 받는데요, 살아가는 것의 의미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 명은 이 세상에서 가치를 낳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끔찍한 인생도 있고, 모든 인생이 가 치를 만들어내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인생이란, 그 안에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 강하고 작은 행복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거기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 p.232
기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윤리적 진보가 필요합니다. 기후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태양광 패널과 수소 에너지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거죠. 더욱 좋 은 배터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팬데믹 대책을 위해 록다운을 실시해도 세계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8.8 퍼센트밖에 감소하지 않았습니다(2020년 상반기). 왜 이렇게 조금밖에 줄지 않았을까요? 서버 탓입니다. 소셜 미디 어는 환경에 좋지 않습니다. 록다운보다 훨씬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록다운을 영구히 실시하는 것보다도,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 pp.241~242
통계적 세계관은 예를 들어 “몇 사람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같은 사실 외에는 알지 못합 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왜 그런가?” 하는 점, 즉 사물의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입니다. 알고 싶은 것은 “실업률이 증가한 까닭은 무엇인가?”처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가?”의 설명이며,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통계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사고가 필요합 니다. 그러한 사고를 질적 사고라 부르기로 하죠. 예를 들어 통계적 사고는 방 안에 몇 사람이 있는가, 문 바깥으로 나가려면 몇 사람 곁을 지 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 등을 묻습니다. 그에 반해 질적 사고는 방에 누가 있는가, 그 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등을 묻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처럼 양적 사고가 아닌 질 적 사고입니다.
--- pp.243~244
좋은 대화, 훌륭한 와인, 멋진 식사. 고도로 감각적인 쾌락은 모두 좋은 삶의 일부입니다. 저 는 그런 의미로 쾌락주의자입니다. 감각적 쾌락에는 사고도 포함되어 있어서 좋은 철학서를 읽는 것은 훌륭한 와인을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죠. 쾌락의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분 좋은 경험을 가능하면 많이 남들과 공유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되도록 즐거워 야 하죠. 즐거움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일이 없어지므로, 즐기는 것이 좋은 생각 임을 알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행위는 괴롭히는 쪽에도, 괴롭힘을 당하는 쪽에 도 무척 불쾌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을 접하는 것은 분명 인류의 진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pp.24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