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밤나무는 갑이(캐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평양에서 약밤을 가져와 상주 산골에 심었다. 약밤은 다른 곳에 심으면 잘 자라지 않고 맛도 달라진다고 했다. 속담에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경북 청도에 있는 씨 없는 감나무를 다른 지방에 갖다 심으면 씨가 생기듯이 약밤나무도 그렇다고 했다.
‘백두대간을 잇는 상주 산골은 평안도 함종리 산골과 해발 높이와 환경이 비슷하니 약밤나무를 심으면 잘 자랄 거야.’
이런 생각으로 토종 약밤 5개를 산밭에 심었단다. 그런데 다람쥐가 파먹었는지 안 나고 비탈에 심은 약밤나무만 살아남았다.
“범호야, 이 토종약밤나무는 평양 함종에만 있는 천연기념물이니 네가 잘 키워보렴.”
갑이의 할아버지는 아들인 범호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어린 범호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 p.18~19, 「백 년을 하루같이」 중에서
“내가 없는 동안 약밤나무를 아주 잘 가꾸었구나.”
범호는 이렇게 말하며 약밤나무 그늘에 앉았다.
“집사가 거름도 많이 주고 잘 가꾸어주었지요.”
“그런데 어린 밤나무도 많이 있구나.”
“첫 밤을 먹지 않고 밭에 심었어요.”
“잘했다. 아주 잘했어.”
범호는 갑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어머니랑 함께 아버지가 아무 탈 없도록 해달라고 은행나무 아래서 정화수 떠놓고 빌었어요.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도 빌었고요.”
“내가 간도 호랑이가 된 게 다 네 기도 때문이었구나.”
“아버지가 간도 호랑이가 되었다고요? ”
갑이가 물었다. 범호는 간도에서 독립군으로 있을 때 복잡하게 얽힌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 p.42쪽, 「북간도 호랑이」 중에서
“세상에, 빨간 완장을 찬 인민 위원장 세상이 되었어.”
“누가 아니래. 덕이는 지나 나나 잘난 것도 없는데 어느 날 붉은 완장을 차더니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고 하잖아.”
“맞아. 죽여야 할 사람 명단을 만들어 인민 위원장한테 가서 허락만 맡으면 끝장이야. 그 명단을 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니까 말이야. 그것도 마을 사람 다 모인 앞에서 공개처형을 하니까 시키는 대로 안 할 사람이 어디 있어.”
“맞아, 이거 무서워 살겠어?”
“그러니까 목숨 부지하려면 덕이 눈치 보며 굽실거리며 살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눈으로 보여준 것이니까.”
농부들은 잠깐 쉴 때 이렇게 짧은 말만 하고는 일어섰다. 그 짧은 말 속에 범호네 식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더욱 궁금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으로 여겼다.
‘왜 이안천의 물이 붉게 흐르는지 이제야 그 까닭을 알겠군.’
약밤나무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한 사람의 기분에 따라 죽일 수 있다는 게 너무 이상했다. 아무래도 범호네가 걱정되었다.
--- p.74~75, 「전쟁의 상처」 중에서
“무슨 일로 이 밤중에 자동차가 마을로 들어올까?”
약밤나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보라는 듯 구름 사이로 달빛이 내렸다. 얼핏 보니 한국전쟁 때 수없이 보았던 국군 지프차처럼 보였다. (중략) 약밤나무는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럴 때 발이 없다는 게 답답했다. 긴 겨울밤이 새날로 이어졌다. 아침이 되자 나무꾼들이 올라왔다.
“별이 된 간도 호랑이가 진짜 하늘로 올라갔다지?”
“어젯밤에 지프차로 갑이가 엄마와 같이 국립묘지로 갔대.”
“그래도 별이 되니 예우가 다르긴 하네.”
나무꾼들의 말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울고 있을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의 늪으로 밀어놓고도 전쟁은 아직 끝날 줄 몰랐다.
--- p.101~102, 「총알을 품은 느티나무」 중에서
힘이 빠진 목소리가 어쩐지 오래 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특히 사산을 한 충격에 남편의 전사 소식은 가슴앓이 병이 되었다. 아들도 지금 월남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이런 운명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죽음까지도 가슴은 아팠지만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남편처럼 아들도 그렇게 될까 봐 불안한 것 같았다.
“조상님, 전쟁이 징그럽습니다. 월남전에서 5099명이나 죽었대요. 부디 우리 갑이가 살아서 돌아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소원이 없습니다.”
갑이네 어머니는 똑같은 소원만 되풀이해서 빌었다.
“얼마나 전쟁의 상처가 깊었으면 저리 걱정을 할까?”
약밤나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갑이네 어머니를 지켜보았다. 일본의 압박과 한국전쟁에서 버텨온 힘겨운 삶이 얼굴 가득 주름으로 묻어나고 있었다.
--- p.144~145, 「끝없는 전쟁」 중에서
“자식은 모두 소중하지만 아픈 손가락이 있게 마련이지.”
“아픈 손가락이라니요?”
“다른 자식에 비해 잘되지 않아 마음 쓰이는 자식이란 뜻이야.”
약밤나무는 태석이의 먼 훗날을 미루어 짐작하며 이렇게 말했다. 세월이 지나야 알겠지만 결과는 뻔했다. 장손에게 관심이 더 쏠리게 되어있고, 자식들은 관심만큼 자란다고 했기 때문이다.
--- p.154, 「잘난 자식과 아픈 손가락」 중에서
새날이 밝았다. 은행나무 둥지에서 날아온 까마치가 말했다.
“약밤나무님, 분이 할머니가 아파 누웠대요.”
“어디가 아픈데?”
“화병인 가슴앓이 병이 깊어졌나 봐요.”
“그럴 만도 하지. 막내마저 집을 나가 소식이 없으니까.”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요.”
“왜 그런 소릴 하지?”
“유언을 했거든요. 죽기 전에 큰아들 한번 보는 것과, 태석이 소식 듣는 게 소원이라고요.”
약밤나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마나 국제전화요금이 비싸도 미국으로 전화를 한 것 같았다.
‘한국말을 못하는 며느리와 손자라 통화가 잘 안 될 게 뻔하지. 큰아들은 회사일로 바빠 전화도 받지 못할 것 같고.’
--- p.184~185, 「부모의 가슴앓이」 중에서
‘세계에서 하나뿐인 토종약밤나무단지!’
그 가치는 알밤 그 이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유전자가 재산이 되는 시대에 식물학자와 생명공학자들이 이 단지에 드나든다. 학술지에 세계에서 하나뿐인 ‘토종약밤나무단지’가 소개되자 방송사마다 찾아온다. 덩달아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이 세상에서 한 곳밖에 없는 토종약밤은 황금 알이 된다. 아픈 손가락이었던 태석이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다. 갑이의 뜻을 헤아려 귀농한 것이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은근한 미소가 피어난다.
‘그래. 그렇게 되면 나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과 기록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약밤나무는 행복했다. 그래서 웃고 있는데 갑이가 올라왔다. 혼자가 된 갑이의 어깨가 더욱 축 처져 있다. 문득 갑이의 외로움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런 갑이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약밤나무도 신이 났다.
--- p.199~200, 「다시 나타난 산까치」 중에서
“조상님, 어제 태암이 친구인 병두와 이호가 다녀갔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태석이를 찾아 귀농할 수 있도록 힘써주겠대요. 이게 다 조상님들의 음덕입니다.”
갑이의 목소리가 혼자 외롭게 사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꿈에 부푼 젊은이 같았다.
‘희망이 생기면 없던 힘도 생기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노인이 저렇게 활력이 넘치다니…….’
갑이의 활기찬 모습은 곧 약밤나무의 기쁨이었다. 약밤나무도 덩달아 신이 났다. 아내의 묘를 두 팔로 보듬은 갑이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할멈. 할멈이 살았을 때 이랬으면 참 좋았을 텐데…….”
--- p.216, 「태석이의 귀농」 중에서
얼마가 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약밤 식품공장으로 왔다. 약밤과 은행알을 굽는 냄새가 봄바람을 타고 약밤나무까지 전해왔다. 캐리와 찬이는 눈을 만난 강아지처럼 좋아서 뛰어다녔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온 산은 진달래꽃을 활짝 피워놓고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산을 붉게 물들인 그 속에서 뻐꾹새 노래가 울려 퍼졌다.
“꿩, 꿩, 꿩.”
꿩 소리도 산비탈을 굴러 내려왔다. 새 중에서 제일 고운 노래를 한다는 꾀꼬리 소리도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알까? 꾀꼬리도 뻐꾹새도 토종이 아니듯 캐리나 찬이도 단일민족은 아니란 것을. 그래도 이젠 배달의 겨레다. 백의민족이다.’
--- p.244~245, 「약밤 식품공장 준공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