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의 보법에 돌아가야 하는데도, 소설가는 시대의 스승이 되어 세상을 향해 뭔가를 가르치는 소리를 마구 해야 하는 줄 알았음에 분명하다. 한 문학평론가로부터 따뜻한 비아냥을 집중적으로 많이 받았다.
“당신의 소설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도 없군요!”
“아무래도 좀 옛날 소설 같다.”
“누군가 설법을 시도하고 소설가가 그 설법을 대필하고 있는 것일까?”
덕분에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무래도 문자로는 안 될 것 같다. 문자로써 되게 하려면, 문자로써는 다만 건드리고 지나가기만 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이 세상 삶의 현상은 거대한 원어 텍스트, 내가 부리는 언어는 ‘원어를 고스란히 재생시킬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역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중에서
문제는 우리말인데, 나는 우리말과의 씨름을 이렇게 하고 있다. 첫째는 사전과의 싸움이다. 사전을 열어야 말의 역사, 단어의 진화사가 보인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한다. 그러나 사전도 맹신할 물건은 못 된다. 거기에 실려 있는 말은 화석화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 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사전적 해석만 좇아 번역한 문장이 종종 죽은 문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말의 어구와 어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복문 속의 종속절은 되도록 어구로 정리하여 단문으로 만드는 주의다. 복문은 글월의 복잡한 성분상 가독성을 엄청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셋째는 살아 있는 표현, 전부터 우리가 써왔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숙어’가 무엇인가? ‘잘 익은 말’이다. 원문의 배후에 숨어 있는, 푹 익은 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잘 읽은 말을 찾아서」 중에서
1980년 카잔차키스 전집을 기획하면서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에 뛰어들었다. 나는 자유인 조르바로 하여금 화자를 ‘두목’이라고 부르게 했다. 나는, 거침없이 쏟아내는 조르바의 푸짐한 언어를 되도록 살아 있는, 난폭한 입말口語에 가깝게 옮기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태어나서 어머니로부터 배운 내 고향 지방어가 툭툭 불거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에이, 경상도 사투리 쓰는 조르바가 어디에 있어요’, 이런 항의도 더러 받는다.
---「조르바에게 난폭한 입말 돌려주기」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맺음말은 이렇다.
‘그럼, 꾸벅.’
‘꾸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야, 이렇게 진화하는구나’였다. 소리시늉말이나 짓시늉말이 가치중립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어서 퍽 참신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30대 중반 사람들은 근엄한 글말 대신 경쾌한 입말을 선호하는 것 같다. 경쾌한 입말에 소리시늉말이나 짓시늉말이 얹히면서 글의 표정이 매우 풍부해지는 것 같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두구두구’는 표준 소리시늉말의 ‘둥둥’에 해당한다. 옛날 같으면 ‘둥둥’으로 무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이 경우에 두드리는 북은 스네어snare, 즉 향현響絃이 붙어 있는 ‘스네어 드럼’이다. 짧은 북채 두 개로써 밭은 박자로 치는 소리시늉말로 ‘둥둥’은 얼마나 부적절한가?
---「보석같은 낱말이 무수히 반짝인다」 중에서
우리 고유문화의 풍경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명사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현상이 수시로 목도된다. 전통의 싱싱한 기운이 듬뿍 실린 말이 퇴조하면서 생경한 말들이 살풍경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명사의 사막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나 자신은 그런 현상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구어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든, 문어로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의 어법에서 나는 명사의 사막화 현상을 확인한다. 적확한 명사로 사물을 적시하는 대신, 있잖아요, 따위의 말을 앞세우고 형용사와 동사를 들러리 삼아 그것을 서술하는 현상이 수시로 눈에 띄는 것이다.
---「명사의 장래에 대한 불안한 예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