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새벽녘과 해질녘에 잠깐 사람이 알아듣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내게는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성인聖人이고 성인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제가 들은 것처럼 그럴듯하게 거짓부렁을 하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그러면, 우리같이 시인의 그 거짓부렁을 듣고, 그거짓부렁을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또 거짓부렁을 하는 사람은 대체 무엇이냐? 암튼 내가 잠깐 읽은 어떤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저녁에 보는 호박한테서는 순하고 밥 잘 먹고 일 잘하는 시골 아주머니의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단다.
“삼시세끼 안 거르고 똥 잘 싸믄 고거시 극락이여 ! 알거써!”
--- p.18
밭 모양이 농부를 닮는 것 같다. 밭이 캔버스라면 농부는 화가지 싶다. 나는 가끔 동네 밭을 그림처럼 감상하곤 한다. 오이밭, 깨밭, 가지밭, 녹두밭, 배추밭, 총각무밭, 마늘밭. 심은 것 따라 밭 모습이 다르다. 분위기도 다르다. 또 그 밭 임자 따라 같은 것을 심더라도 밭 분위기가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다르고 저녁 어둠이 내리는 모습이 다르다. 같은 풍경을 그려도 화가마다 구도가 다르고 빛깔이 다르고 붓질이 다르듯이.
--- p.59
나는 의성어 교육에 상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획일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까마귀는 까악까악 또는 까르르까르르 우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까록까록이나 쿨럭쿨럭으로 들리기도 한다. 개구리도 마찬가지. 보통 개구리가 개골개골 운다고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걀걀, 그갤그갤, 스웨웨웨웻, 스웨웨웻 하고 울기도 한다. 유아나 초등학생한테 의성어교육을 시킬 때, 아이들을 이미 정해진 의성어에 적응시키지 말고, 자신의 귀에 들리는 그대로 충실하게 듣도록, 기왕이면 자신만의 의성어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해 전부터 해오고 있다. 이것이 자연을 깊이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고 또 상상력이나 언어감각을 발달시키는 데도 무척 중요하지 않겠는가. 동물들이 내는 비분절음은 인간에게 굉장한 감흥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걸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 언어로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70
거미는 내 방에서 가장 조용하고 품위 있는 부족이다. 내가 거미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놈들의 거주에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놈들은 돈벌레처럼 나대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연민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나방처럼 수선스럽지도, 말벌처럼 음험하지도, 귀뚜라미처럼 뚱딴지같지도, 개미처럼 집요하지도, 노린재처럼 약빠르지도, 딱정벌레처럼 갑갑하지도, 흡혈모기처럼 표독하지도, 파리처럼 외설스럽지도 않다.
--- p.82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살아 있는 것 속에 있는데,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달아난다. 달아나지 않는 것은 죽은 것뿐이다. 나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하나도 알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
--- p.84
오이가 어떻게 오이지로 변신하는지, 도토리가 어떻게 도토리묵으로 성육신하는지, 햇살이 옥수수에 어떻게 단맛을 들이는지, 잡초에 갇힌 고추에 어떻게 빨간 물을 들이는지 알 수 있다면, 염천을 견뎌낸 콩이 물과 소금과 하늘을 만나 어떻게 된장이 되는지, 어떻게 간장이 되는지 알 수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다면, 내가 왜 태어났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을 텐데.
--- p.89
내게 달리기의 가장 커다란 즐거움은 정신적인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실험해본 바로는, 인생이 부과하는 문제들 중에서, 형이상학 분야나 신경생리 분야와 관계있는 문제들은 거의 백 퍼센트 달리기로 해결된다. 염세와 비관과 우울에는, 내가 보기에는 이보다 특효약이 없다. 안 달려본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해골세척 효능, 놀라운 영적 치유력이 있다. 이에 필적할 만한 것은 등산과 굿섹스 정도가 있을까.
--- p.140
십오 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돈벌레가 홀연 나타나서 며칠 동안 수시로 방을 휘젓고 다녔다. 놈은 천연덕스럽게 내 몸으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몰골이 너무 징그러워서 쫓아내야겠다고 몇 번 다짐을 해보았지만, 징그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물리적 해악도 끼치지 않는 놈을 추방하는 건 부당한 처사가 아닌가. 그래서 내면의 갈등을 겪는 중이었는데, 어저께 어깨로 기어오른 것을 떼어내자 책장 밑으로 달아나더니 여태 보이지 않는다. 놈이 내 방을 떠난 이유가 궁금하다. 놈이 나를 징그럽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 p.156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당신은 둔감해지거나 당신 자신이 아이러니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아이러니가 되기로 결심했다.
--- p.157
세사에 무능하다 보니 세상에 관심이 없어진다. 세상에 관심이 없어지다 보니 신선이나 잡귀 같은 허망한 존재들한테 마음이 쏠린다. 마음이 헛것에 쏠리다 보면, 가끔,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헛것이 더 실재스럽고 실재가 더 헛것스러운, 황당하고도 유쾌한 증세에 시달리게 되기도 한다.
나 같은 질환을 앓는 사람에게는 전원이 도시보다 낫다. 도심에 들어가면 문득문득 무슨 흉가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은 그 흉가에 기생하는 악귀나 원귀나 잡귀로 보이고, 여자는 다 요물로 보이고. 하기야 제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건 불합리한 가정이다. 재미없는 상상이기도 하고. 열에 서넛은 헛것이 인간의 탈을 쓰고 나다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더 세상답고, 무엇보다도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길거리를 다닐 때 한번 유심히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보시라. 잘 아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거지를 꼼꼼히 따져보시기 바란다. 내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 p.233
나는 바쁘면 사는 게 정말 불행해진다. 내 몸의 호르몬 분비 시스템에 급격한 장애가 일어나는 것이다. 직장을 여러 번 옮겨 다녔는데, 그중 몇 번은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 게다가 매일 회사에 가야 하는 ‘불편’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한심한 놈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보기에도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청춘을 보낸 결과는 도덕 교과서와 각종 인생론이 장담하는 그대로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세월, 인과응보의 쓰디쓴 열매다.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주와 관상 양쪽에 능통한 도인을 아는데 그 도인이 날 보고한 단언이 있다. 나는 절대 갑부 독신녀를 만날 팔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팔자가 서러울 뿐이다. 개울 옆에 묶인 흑염소를 볼 때마다 내가엾은 운명을 헤아려본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담즙을 감로甘露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다. 거친 잡풀들을 맛나게 뜯어먹는 흑염소처럼.
--- p.261
낮에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오기에, 봄에 곤성困星이 앞뜰에 떨어지고 가을에 궁성窮星이 뒤뜰에 떨어지더니 겨울 초입에 웬 땡중 한 놈이 집 앞에 와서는 목탁을 두드리며 읊조리기를,
게으르면 말년에 고생하네라
게으르면 말년에 고생하네라
염장을 지르길래 물을 한 바가지 퍼다가 쫓아버렸는데, 그 땡중놈이 달아나서 필시 어디다 대고 고자질을 했던 게 틀림없지, 올겨울 역대 최악의 궁상으로 내몰려서 아침저녁으로 새들이 들여다보고 혀를 찰 지경이 되었건만, 이 몸이 워낙 타고난 낙천에 내구력이 금강석인지라, 밥과 된장과 김치와 낡은 전축과 동산에 뜨는 달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운 게 없고 또 두려운 세상도 없나니,
--- p.313
고통에 찬 아버지의 얼굴 위로 아버지의 과거 모습이 흘러갔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육신이 눈에 띄게 허물어져가던 지난 몇 년간의 모습, 세 차례 대수술로 다리가 만신창이가 된 아버지, 척추가 하나하나 내려앉던 아버지, 심한 녹내장으로 반소경이 되어 극심한 안통에 시달리던 아버지, 진통제에 절어서 용변도 제대로 못 가리던 아버지, 늘 고통을 호소하시던 아버지, 그 와중에 끝까지 붙잡고 계셨던 노욕, 고집, 악습, 그로 인한 어처구니없는 분란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아버지의 젊은 모습, 지금 나보다 훨씬 젊은 얼굴들만 떠올랐다.
퇴근 때면 맛난 과자나 호떡, 찐빵 같은 것을 사 오시던 아버지, 골목길에서 창문을 툭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우리가, 아버지다, 하며 마루로 뛰쳐나가면, 뒷짐에 먹을 것을 감추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던 아버지, 나비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나를 화신백화점에 데려가시던 아버지, 동생과 함께 마포에서 전차를 타고 도시락을 가지고 가면 을지로오가 사무실에 앉아 계시다가 활짝 웃으며 반기시던 아버지, 한여름 모시적삼을 입고 마루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수박을 자시던 아버지, 명절날 제상 옆에 서서, 절들 해라, 엄숙하게 말씀하시던 아버지, 다리를 절던 스물여덟 막내삼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방 안에 누워 작은삼촌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이제 큰삼촌, 작은삼촌을 모두 만나게 되는 것일까…… 전도사의 말이 자꾸 귓등에서 미끄러졌다. 소멸의 순간, 나는 내가 믿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끝까지 절망과 허무를 혼자 힘으로 통과할 수 있을까? 지푸라기를 잡지 않고 그냥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을까? 나는 죽음보다 죽음에 굴복하는 나 자신이 더 두려웠다.
--- p.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