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아버지는 친구 분들이 “아들이 피부과 의사여서 그런지 얼굴에 검버섯이나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고 하며 부러워한다는 자랑 아닌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 얼굴에 작은 잡티나 검버섯이 보이면 병원으로 모셔와 레이저로 없애드리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기침과 가쁜 숨은 내 눈앞에서 바로 사라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
어쩌면 아버지는 이런 불편한 장치들을 왜 해야 하고, 꼭 해야만 하는지, 자신의 상태는 어떻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런 것들이 궁금하지는 않았을까요. 당시 아버지와 나는 필연적으로 다가올 죽음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를 대화에 끌어들일 용기는 없었습니다. (…)
‘당신은 이렇게 죽을 것이다’라는 말은 어쩌면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그리고 미래의 나를 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침대 곁에서 이 책을 펼쳐놓고 우리 모두 언젠가 한 번은 떠나야 할 죽음이라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프롤로그 :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며」중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감정적으로는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는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고 신체적으로는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감정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와 자기 성찰을 통해 이별을 준비하는 정리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조금씩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신체적인 두려움은 막연한 상상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죽음을 앞둔 마지막 투병 기간 내내 감정을 어둡게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죽음의 순간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한다면 막연히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오면 뇌의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의식을 잃어가게 됩니다. 통증이라는 감각을 느끼는 것은 뇌의 기능이 정상일 때 가능한 것이어서 죽음이 가까워져 점차 의식이 사라지는 상태에서 고통스럽다는 감각 자체는 극도로 무뎌지거나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3. 경험담을 남길 수 없는 경험」중에서
흔히 “사람은 죽으면 모두 한 줌의 재로 돌아간다”고들 합니다. 이 말은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연에 회귀하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죽어서 한 줌의 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기도 합니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의 의지와 가족 간의 충분한 논의 후에 적절한 장례 방법을 선택하지 못한다면 저절로 한 줌의 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4. 죽음, 그 후」중에서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 따른 각종 생명 연장 장치와 의술은 당신이 결코 마음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의사는 모든 의료 지식과 의료 기술을 동원하여 환자를 치료할 의무가 있고 정당한 사유 없이 치료를 거부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연명 의료에 대한 법률적 거부 의사가 없다면 마지막까지 당신의 입, 코, 혈관에는 각종 튜브와 주사가 꽂힌 채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이해하고 현명하게 판단하여 인생 마지막만큼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로 사전에 연명 의료 거부 의사를 공개적으로 남기는 순간 비로소 마음대로 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당신은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중에서
현명한 죽음의 설계를 위해서는 제일 먼저 환자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해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당사자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해 풀리지 않는 무수한 질문과 더불어 화나고 분한 생각에만 계속 휩싸인다면 잘못된 판단과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신체적 질병을 정신적, 정서적, 영적 차원에서 다스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에 의해 육체를 통제해야 하는 인간 본연의 실체에 비추어 본다면 결국 마음으로부터 현실을 수용하고 평온을 찾으려는 노력이 현명한 죽음의 설계를 위한 시작이 됩니다. 필요하다면 명상이나 기도 혹은 자연, 음악 등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은 육체적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 사회적, 영적 등 다양한 문제로부터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불확실해진 상황에서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시작해야 하지만 여러 불안 요소를 혼자 해결해 나가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
말기 환자 가족과 주변인들은 죽음에 대한 논의나 대화가 자칫 환자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중하고 희망을 저버리는 것으로 생각해 의도적으로 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양적 관념에서 죽음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언급해주기 바라면서 서로 회피하다 보면 자칫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와 달리 말기 환자 대부분은 인생의 마지막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준비하려는 열망이 강합니다. 올바른 죽음의 설계를 위해서는 죽음 하면 떠오르는 두려움, 슬픔, 고통 같은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대화하고 서로 협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0. 죽음을 설계하다」중에서
편의와 효율을 중시하고 핵가족화, 도시화 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점차 사라지고 병원이나 요양원 등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이제 시골에서조차 보기 어려운 광경이 되었고 대부분은 장례식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희망은 사치가 되었고 가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취급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방이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낯선 침대에서 온갖 의료 기기를 매단 채 맞이하는 죽음이 과연 원하던 모습이었을까 싶습니다. 홈다잉을 진정으로 원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둔 이들의 희망을 가족이나 사회가 이루어줄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12. 웰빙의 완성, 웰다잉」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