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소리를 잃었다. 조금 놀랐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힘들지도 않다. 그저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제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게만 들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꼭. --- p.25
모계 가족의 기질은 반드시 대를 걸러 유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엄마는 너무도 정숙한 외할머니에게 반발해 그것과는 정반대로 파란만장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반발해, 또 그것과는 정반대인 평범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오셀로 게임을 하는 것처럼 엄마가 하얗게 칠한 부분을 딸은 열심히 검게 덧칠하고, 그 딸인 손녀는 다시 하얗게 칠하려고 노력한다. --- p.73
그 작은 공간을 책가방처럼 등에 메고, 나는 지금부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와 식당은 일심동체. 일단 껍데기 속에 들어가 버리면 그곳은 내게 ‘안주(安住)의 땅’이다. --- p.75
여전히 나는 하루에 한 번 엘메스의 똥을 밟는다. 밤송이가 머리 위에 떨어지는 일도 있고, 길가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뻔한 때도 있다. 그래도 도시에 살던 시절보다는 작은 행복을 만나는 순간이 훨씬 많다. 길가에 뒤집어진 공벌레를 구해 주는 것이 행복했다. 닭이 갓 낳은 계란을 뺨에 대고 온기를 느끼는 것도, 아침 이슬에 젖은 풀잎의 다이아몬드보다 예쁜 물방울을 발견하는 것도, 대나무 숲 입구에서 발견한 레이스 컵 받침처럼 아름다운 비단그물버섯을 겨된장에 넣어 먹는 것도.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신의 뺨에 감사 키스를 보내고 싶은 사건들이었다. --- p.79
얼마 동안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을까. 잠시 후 달그락, 하고 식기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서 커튼 너머로 식당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손에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사과겨된장절임을 천천히 입에 넣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식전주가 아주 약간 줄었다. 나는 굴과 옥돔 카르파초를 올릴 접시를 얼른 꺼냈다. --- p.106
나는 대부분의 사람과 생물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엄마만큼은 도저히 진심으로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엄마를 싫어하는 마음은 그 외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에너지와 거의 동등할 만큼 깊고 무거웠다. 그것이 내 진정한 모습이었다. 사람은 항상 맑은 마음으로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흙탕물이다. --- p.173
어쨌든 중요한 건 무심해지는 것. 제일 싫어하는 네오콘을 위한 요리를 만드는 것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지만 그 사실을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싫어하는 감정은 반드시 맛에 반영되니까, 마음도 머리도 비우기로 했다. “초조해하거나 슬픈 마음으로 만든 요리는 꼭 맛과 모양에 나타난단다. 음식을 만들 때는 항상 좋은 생각만 하면서, 밝고 평온한 마음으로 부엌에 서야 해.” 할머니가 곧잘 해 주시던 말씀이다. --- p.205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단두대처럼 내 목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댄다. 행복에 대한 기대의 실을 무자비하게 뚝 끊어 놓는다. --- p.210
세상에는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미미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은 큰 강물에 휩쓸려 흘러내려 가면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좌우된다. --- p.216
그날 일을 더 떠올리면 내가 망가져 버릴 것 같다. 그러니 조금만 생각하도록 하자. 정말로 소중한 것은 내 가슴속에 넣어 놓고 열쇠로 꼭꼭 잠가 두자. 아무에게도 도둑맞지 않도록. 공기에 닿아 색이 바래지 않도록. 비바람을 맞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 p.252
인스턴트식품에는 감정이며 생각이 전혀 없어서, 과민해진 내게 아주 적당한 음식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싶어서 인스턴트식품만 먹었을지도 모른다. 가끔 요리를 만들어도 맛이 나지 않았다. 문어가 자기 발을 먹고 배를 채우는 것처럼, 고양이가 자기 성기를 핥는 것처럼 뭔가를 먹고 있다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요리는 자기 이외의 누군가가 마음을 담아 만들어 주기 때문에 몸과 마음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 p.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