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연료’, ‘삶과 죽음’ 역시 원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여 발생한 개념들이다. ‘연료可燃’가 없으면 ‘불燃’이 없고 ‘불’이 없으면 ‘연료’도 없다. 장작이나 성냥개비, 액화가스와 같은 연료가 없으면 불이 존재할 수 없다. 바람에 날려서 허공을 떠가는 불꽃이라고 하더라도, 순수하게 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숯과 같이 붉게 달궈진 ‘탄소 알갱이’들이 연료 역할을 한다. 그것이 더 산화되면 무색투명한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탄소가 되어 불꽃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아무리 세밀하게 분석해보아도 ‘연료가 없으면 불이 없다.’ 이와 반대로 ‘불이 없으면 연료가 없다.’ 헛간에 쌓아놓은 장작이라고 하더라도 불이 붙기 전에는 연료가 아니다. 장작은 나중에 울타리용 말뚝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한옥의 서까래가 될 수도 있고, 목침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 원인 때문에 결과가 발생하지만, 거꾸로 결과가 발생해야 원인의 정체가 확정되는 법이다. 그것이 헛간의 장작이든 라이터 속의 액화가스든 그 무엇이든, 불이 붙지 않으면 연료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또, 삶이 없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기에 ‘죽음이 없으면 삶이 없고’, 삶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죽음을 떠올릴 수 없기에 ‘삶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삶도 원래는 삶이랄 것도 없고, 죽음 그 자체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선객禪客들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포효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pp.129-130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것,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확인되는 모든 것 가운데 ‘물질’과 무관하게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없고 ‘마음’과 무관하게 ‘물질’로만 존재하는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순수하게 객관적인 사건이나 순수하게 주관적인 현상은 결코 체험한 적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다. 내 앞에 놓인 꽃은 그에 대한 인식을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객관 대상’이지만, 그것을 보고서 나에게 떠오른 느낌과 생각 등은 ‘주관적 체험’이며, 그런 주관적 체험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뇌신경의 물리화학적 변화는 객관적 사건이다. 또 내가 백일몽을 꾸면서 어제 감상했던 베토벤의 음악을 회상할 때, 그런 생각과 느낌은 남에게 포착되지 않는 ‘주관적 체험’이지만, 그에 수반하여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변화는 ‘객관적인 사건’이다. 순수하게 객관적 물질인 줄 알았던 ‘꽃’을 볼 때에도 주관적 체험이 일어나고, 순수하게 주관적 체험인 줄 알았던 ‘꽃에 대한 느낌’이나 ‘백일몽’에서도 뇌신경의 객관적 변화가 수반된다. 최근에 는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 장치로 뇌에서 일어나는 이런 변화를 역동적인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p.132
마음이 실재하는가? 일상 어법으로나 선문답에서나 “마음”이라고 묘사하지만, 마음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실제로 있다고 확언할 수 없다. 혜가는 마음이라는 말로 존재의 불안을 표현했고, 달마는 마음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대상의 비실체성을 자각하게 했다. 마음이 부처라고 하지만, 부처로 복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 없애기다. 있는 그대로 도이고 부처이기 때문이다. 조사선문에서는 부처나 중생이 따로 있지 않다. ---p.297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과 자유를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자유와 행복을 나 혼자가 아니라 모두 함께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바이다. 불교의 근본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의 이론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 서 생겨난다. 우리의 괴로움도 원인과 조건이 있다.1괴로움을 없애서 행복과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가장 큰 원인을 탐욕과 어리석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탐욕과 어리석음을 없앨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이다. 그런데 이 탐욕과 어리석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 대승불교의 많은 학파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마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원효도 마음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였다. 마음의 깨달음을 얻어 일심一心의 근원에 돌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p.311
불교는 마음에 집중한다. 마음은 늘 다른 것에 점유되어 있고, 그리고 무상하게 이동한다. 자체의 내용을 갖지 않고, 걱정과 상념에 휘둘리며, 어디인지 모르게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그 상념들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자기 것’이 아니다. 즉 자기에 의해 추동되지 않고, 늘 타자와 영향, 그로 인한 염려와 조바심으로 물들어 있기에 한순간도 ‘자기로부터自由’인 적이 없었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되 자기 것이 아닌, 이 기이하고 낯선 부조리, 이방의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은 자신의 감정과 의지, 상념과 충동으로부터 이를테면 ‘소외’되어 있다. 소외는 근대의 관념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정황을 가리키고 있다. ---p.401
솔바람 사방에서 불어오고, 청산에 가을 달 밝다. 하늘은 물처럼 ‘하나’로 걸려 있다. 노란 꽃 푸른 대, 꾀꼬리 소리, 제비 지저귐. [자연은] 늘 위대한 작용大用을 모든 곳에서 드러낸다. 시정의 천자가 무어 대단하겠는가. 평지에 이는 파도, 구천[저승]에 새긴 옥도장일 뿐. 기이하다! 해골 안에 빛나는 눈이 있어, 수많은 불조佛祖가 늘 현전하고 있다. 초목과 와석瓦石이 이것이다. 화엄과 법화를 나는 늘 설하고 있는데, 행주좌와,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이 이것이다. 여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p.409
만해가 생각한 자아의 완성은 외적 원리나 이념에 지배되거나 규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원과 마음에 대한 통찰에 집중된다. 그는 자아의 완성이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계발하는 것이며, 이렇게 계발된 자아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 선의 본령이라고 봤다. 이렇게 종속되지 않는 자발성은 강렬한 주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종교라는 외형적 규제조차 끝내 뿌리쳐야만 하는 강렬한 자의식이다.
---p.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