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에도 휘둘리거나 잡아먹히지 않고 자유로이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내공을 기르는 것. 그리하여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옛이야기의 영원한 결론인 해피엔딩이며, 고전에서 말하는 생생불이(生生不已)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무심하고, 인생은 공정하지 않지만 삶은 이어져 왔고 나 또한 지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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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에게 우렁이 껍질은 ‘자기만의 방’이다. ‘때가 되어’ 서로의 어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사랑조차 벗어날 수 있는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각은 ‘천하일색’인 겉모습과 밥상을 차리는 손에 안달을 낼 뿐 색시의 내면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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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는 누구나 나지만 아무나 피울 수 없다. 위계 사회에서는 냄새도 권력이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의 영토는 그의 냄새가 지배한다. 그의 사적 공간인 집 안에서 씨족으로 보나 젠더로 보나 외부자인 며느리가 감히 냄새를 피울 장소는 없다. 억압받는 방귀는 가부장 사회에 포위된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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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오싹한 것은 여느 여성 악당들과 달리 그녀에게는 피해자 서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젠더 폭력에 대해 복수하려는 ‘한 많은’ 여자가 아니며, 꼬집어 응징해야 할 가해자가 없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악당에게 앳된 여성의 얼굴은 성능 좋은 가면일 뿐이며, 성 역할은 비장의 공격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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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가부장의 부와 권력은 그가 훌륭해서 독점할 수 있었던 게 아니며, 돌을 금으로 만드는 복은 공감하고 지지하는 따뜻한 관계에서만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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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셋이나 낳고 살도록 나무꾼은 아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떠났는지도 알 수 없다. 심지어 처음 만났던 그 연못에조차 가 볼 엄두를 못 내고, 자기 연민에 빠져 울고 있다가 또다시 노루 덕에 간신히 아내의 뒤를 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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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은 ‘사람’이다. 밥의 주인인 그는 밥을 지어 주는 ‘여자’가 식욕이 왕성하다는 걸 알았을 때 두려움에 휩싸인다. 여자가 감히 분수를 모르고 ‘사람’처럼 먹을 것을 탐하다니!
오늘날까지 여성의 몸은 음식으로 취급되어 왔다. 앵두 같은 입술부터 조개인 성기까지 부위가 나눠진 채 먹을거리로 표현된다. 귀한 딸은 ‘고명’이 되어 음식의 때깔을 보태고, 술 취한 여성은 ‘골뱅이’가 되어 ‘따먹힌다’. 식욕과 성욕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라지만, ‘먹히고’ ‘대 주는’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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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호랑이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야기에서는 호랑이가 나쁜 놈임이 처음부터 드러나 있지만, 현실에서는 번듯하고 점잖은 악마가 오히려 많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의 폭력은 좀처럼 드러내기 어렵고, 드러낸다 해도 폭력으로 이름 붙이기가 어렵다. 어처구니없게도 세상에는 팥죽 할머니보다 호랑이를 위해 준비된 말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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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할머니는? 당연히 잘 살았을 것이다. 남자인 구세주에게 거룩한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면, 하늘 아래 몸뚱이 하나만으로도 꿀릴 것 없던 여자에게는 열두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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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둑의 성별을 굳이 사내로 못 박을 필요는 없다. 단군 신화에서도 큰곰(환웅)의 정기(불알)를 얻어낸 자는 웅녀였으니 말이다. 다만 웅녀는 아들을 낳아 주고(?) 신화에서 지워졌지만, 소도둑은 옛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 p.69
여자는 단호하게 도깨비를 내보낸다. 쫓겨난 도깨비는 ‘여자를 좋아한 죄’밖에 없는 자기가 도리어 피해자라며 소란을 떤다. 이른바 ‘꽃뱀’한테 억울하게 당했다는 소린데, 떠들어 댄들 여자가 대문을 다시 열어 줄 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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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나 영웅과 같이 웅장한 담론으로는 이 작은 몸의 안타까운 죽음을 담아 내기 어렵다. 말이 좋아 ‘아기장수’지, 부모 손에 살해된 핏덩이가 아닌가. 이 이야기에는 오랫동안 광범하게 행해져 온 영아 살해의 공공연한 비밀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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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새가 간 길은 그동안 엄마가 해 오던 노동으로 이어져 있다. 모 심고, 담배 심고, 까치와 멧돼지를 먹이던 길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태산 같은 빨래를 씻어서 삶아서 헹궈 풀 먹여서 농 안에 넣어 줘야” 한다거나, “변소간의 구더기를 다 주워서 아랫물에 씻고 윗물에 헹궈 까마귀 입에 넣어 주는” 행로를 길고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아들은 논일, 밭일, 집안일에 양육과 보살핌 노동을 떠맡으며 살아온 엄마의 고단한 발자취를 따라 새의 집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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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콩쥐는 처음부터 ‘말하는 아이’였다. 엉엉 울면서도 암소와 두꺼비와 참새와 이웃집 할머니에게 왜 서러운지, 얼마나 애쓰며 살고 있는지 말했다. 그 말들은 분노와 서러움을 달래는 노래였으며 세상과 연대하는 무기가 되어 왔다.
--- p.111
양반집 안주인인 어머니가 가부장에게 부여받은 책임과 권력은 딸에 대한 단속이다. 계급 사회일수록 하층 계급의 여성은 성적으로 착취되고, 상층 여성은 성적으로 구속되기 마련이다.
새로 태어난 어머니는 모성에 갇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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