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즉 눈멂은 단지 하나의 주제에 그치지 않는다. 눈멂은 하나의 관점이다. 따라서 시력을 잃어가던 그 긴 세월이 있었기에 3000년에 걸친 문학·과학·철학 등의 저작과 자서전을 통해 눈멂의 문화사를 알게 된 건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솔직하지 않은 태도이다. 확실히 그 세월 덕분이었다. 반대로 우리의 시각 중심적 세계에서 눈멂에 대해 연구하면서 나는 시각장애인이든 비시각장애인이든 간에 우리의 능력과 장애를 개념화하는 방식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 p.12
눈멂은 문학적 수사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삶의 경험이 가지는 특수성과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흔히 말해서 ‘맹인’은 남달리 순수하거나 초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상화되거나, 아니면 서투르거나 부주의한 사람으로 측은하게 여겨진다. 아마 시각장애인 스스로가 이미지를 만들게끔 허락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인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서구 문학의 출발점에 서 있는 호메로스는 웅대한 예외라 할 수 있다.
--- p.15
눈먼 음유시인의 계보는 놀랄 만큼 길지만, 눈멂의 은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맹인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유는 독서 대중에게 끌려다니는 출판계가 시각장애 작가들에게 역경 극복의 모델을 따르는 개인적 서사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 p.16
켈러는 당시의 사회 문제에 관해 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편집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켈러는 서문에서 이렇게 끝을 낸다. “나에 관한 것이 아닌 주제로 글을 쓸 기회가 생길 때까지 세계는 지식도 정보도 없는 채로 계속 굴러갈 것이며, 나는 나에게 허락된 작은 주제 하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 켈러가 20대에 쓴 자서전은 여러 장애인 공동체에서 말하는 이른바 ‘영감 포르노(inspiration porn)’, 즉 비장애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씩씩한 개인의 힘을 믿게 만드는 식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완벽한 예이다.
--- p.16~17
은유적이고 문자 그대로의 눈멂과 봄의 복잡성을 따라가면서, 문자 그대로 눈먼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장벽이 얼마나 얄팍한지도 보여주고 싶다. 이 책은 우리 문화에 만연한 시각 중심주의를 조금씩 벗겨내고, 감각의 차이를 수용하는 사회 정의의 공간을 열어젖히고,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눈멂과 봄, 어둠과 밝음 사이에 놓인 얼룩덜룩하고 광활한 지대를 찬양하고자 한다.
--- p.21
보이지 않는 진실의 문제에 관한 한, 눈먼 예언자가 소환되어 피상적이면서 이상하게 비본질적인 외부 세계 속에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눈멀기는 우리의 내면적인 눈멂을 인정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것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나의 관습으로 만들었고, 우리는 그 예술을 물려받은 것이다.
--- p.58
바울이 썼다고 여겨지는 「고린도전서」에는 인간의 제한된 시력을 묘사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봅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눈멂을 고쳐주는 능력을 말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 이야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이것이 아닐까. 우리가 우리 시력이 아주 완벽하다고 믿을 때조차도(또는 특히나 그렇게 믿을 때) 우리의 시력은 근본적으로 어둡고 불완전하며, 시각은 오만과 자존심, 영원한 독선과 연결된다는 깨달음 말이다.
--- p.71
우리의 감각은 부정확하고 제한적일 것이다. 그러나 감각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배우고 감각 너머 또는 그 아래 있는 것을 상상하고 구성할 수 있을까? 애초에 초월의 욕구를 자극하는 가정을 고민한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 우리에게 세계를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몸과, 더듬거리고 틀리기 쉬운 우리 몸의 감각뿐이다. 경전을 읽는 것부터 송가를 듣는 것, 제단 위로 몸을 뻗는 것이 다 그렇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시각장애인들은 몸과 몸의 유혹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그 미심쩍은 이분법, 실질적이고 문자적인 영역에서 많은 난관을 안겨주는 사고방식, 그리고 영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계속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문화적 생산물이 그 시야를 넓히고 감각이나 초월과 관련해 더욱 복잡하고 거대한 은유를 즐기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 p.78~79
우리는 맨눈, 즉 인간의 제한된 시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드러내는 한 점, 말 그대로의 점에서 시작한다. 현미경은 우리에게 보이는 날카로움과 매끄러움이 그것의 참된 속성 또는 최종 실체라는 우리의 확신을 무너뜨림으로써, 매끄러운 표면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의 크기, 거리, 감각의 예리함에 상대적이라고 깎아내린다. 이런 깨달음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일단 고정된 양극성을 영원히 괴롭힐 것이다.
--- p.103
언어의 경우처럼, 우리의 시각에도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것, 관습과 관례의 문제인 것이 많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것이 유용하기는 해도 정확히 진실은 아니다. 몰리뉴와 로크가 직관으로 알았듯, 판단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평생 연관성을 구축해온 우리의 시각은 비록 유용하기는 하지만 종종, 그리고 쉽게 우리를 속인다. --- p.146
후천적으로 ‘보게 된다’고 해서 시각 지향적인 사람이 된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 또는 비시각장애인이 어둠 속에서 보는 것이 눈멂과 같지 않다는 것, 이런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의 문화로서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인지적 경험인 눈멂에 관해 어떤 지적인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언어로 옮기면서 노력하는 것만큼 많이, 지적으로 그만큼 엄밀하게, 시각장애 경험을 언어로 옮기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눈멂이 대다수 비시각장애인의 경험 바깥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눈을 뜬다는 것이 갑자기 돌이킬 수 없이 시각을 갖게 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 p.164~165
점자는 어떤 문자만큼이나 훌륭하고 유용하고 임의적이다. 그리고 학습하면 모든 문자처럼 배울 수 있다. 알파벳이 하늘에서 인간에게 내려온 게 아니라, 모든 문화유산처럼 전쟁과 정복과 적응과 학습의 상황을 거치며 발달했음을 잊어버린 사람이 너무도 많다.
--- p.207
점자를 반대하는 주장과 비슷하게, 반향 정위와 관련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혀 차는 소리나 그 밖의 소리로 공간을 판단하는 행위는 비시각장애인과는 너무나 달라서 소외감을 낳을 우려가 있고, 비시각장애인과의 사이에 장벽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 같다. 적어도 그것이 대체로는 아주 최근까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였다.
--- p.223
켈러는 시각장애인, 그리고 사실상 모든 부류의 장애인은 욕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감동을 주고 성스러워야 한다는 엄격한 주장의 피해자였다. 이런 이유로 영감 포르노 스타(감동적인 강연으로 밥벌이하는 수많은 장애인)는 많지만, 장애인 섹스 심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책이나 영화에서 섹스하는 시각장애인을 찾아보기도 힘들다.
--- p.259~260
계몽주의의 이상이 눈먼 사람의 삶을 개선해왔음은 의심할 수 없지만, 가끔은 그 진보가 단일한 관점에서 틀 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비장애인의 시점 말이다. 이것은 아주 유용한 카테고리도 아니다. 정체성의 나머지 카테고리와 달리, 장애는 유동적이다. 우리는 종종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장애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장애가 있으며, 우리 대부분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어느 정도의 장애를 경험하게 된다.
--- p.362
눈멂의 밈이 만들어낸 거대한 네트워크는 자신을 비시각 장애인, 시각장애인, 그 중간, 그 너머(신체적 결핍에 대한 멋진 보상인 시각 너머의 시각)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크든 작든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나는 시각장애가 멋지다고 늘 생각하지는 않지만, 물리적 눈의 능력 너머에 볼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시각 중심의 세계에서 어떤 권력감이 생기는 것 같다. 따라서 눈먼 예언자(앞을 내다보는 맹인이라는 뜻의 모순어법 같지만, 우리의 은유를 지배하는 인물)는 눈멂이 실제로 이해에 유용하다는 관념을 조장한다. 우리가 보았듯 눈먼 예언자는 진부하고 끝없이 반복되지만, 그래도 나는 눈먼 예언자 밈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시각 상실로 몸부림치던 초기에는 나에게 눈멂의 자긍심을 조금이나마 일깨워주었다.
--- p.3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