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흐친과 대화주의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언어학자 및 문학이론가로 알려진 미하일 바흐친(Mikhail Mikhailovich Bakhtin, 1895-1975)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의 한 명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재발견되기 시작한 그의 이론은 철학, 기호학, 사회이론을 아우르며 교육학을 포함하여 제2언어습득 분야에까지 상당한 시사를 던져 준다. 현대 사회언어학의 성과를 이미 반세기 전에 예고한 언어철학자로서 바흐친은 인문 사회학의 각 분야에서 재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이론은 80년대에 걸쳐 지금까지 영미와 서유럽에서 ‘바흐친 산업’이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그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Clark & Holquist, 1984). 오늘날 바흐친의 대화주의는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철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활발하게 적용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1980년대 후반 일부 연구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90년대 러시아 문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였다(이강은, 2011).
제2언어습득 연구 분야의 경우, 1990년대 후반에 주류를 형성하고 있던 기존 인지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사회적 전환(social turn)’이 제기된 초반에는 바흐친의 대화주의와 비고츠키의 사상이 거의 동등하게 인지주의를 보완, 대체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추후 언어를 사고의 도구로서 전면적으로 제시한 발달심리학기반의 비고츠키의 사회문화이론에 더 비중이 실리면서, 언어의 본질을 대화로 보며 철학적으로 설명한 바흐친 이론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된 경향이 있다(White, 2014).
바흐친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규범적인 형태의 추상적이고 닫힌 기호 체계의 집합으로 보는 형식주의자들(formalists)과 입장을 달리했다. 즉 언어에 고정되고 불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보는 소쉬르의 견해에 대하여 반대 입장을 제기한 바흐친에게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며 개개인이 처한 상황, 맥락, 환경, 개인의 의도나 의식이 언어 사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대화주의(dialogism)’로 대표되는 바흐친의 언어 이론은 언어와 텍스트 개념의 특징을 ‘존재(being)’가 아닌 ‘생성(becoming)’으로 봄으로써 의미의 불확정성, 주체 개념에서 타자의 중요성, 초월적이고 단일한 원리의 거부 등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후기구조주의로 통칭되는 현대의 예술·사상적 흐름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이강훈, 2015).
5.1. 대화
삶의 구성 원리
바흐친의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은 항상 대화적이다(Bakhtin, 1981). 따라서 바흐친에게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대화(dialogue)’인데, 여기서 의미하는 ‘대화’는 일종의 독특한 세계관으로서 바흐친의 ‘자아(self)-타자(other)’ 개념이 잘 드러나는 용어이다. 바흐친은 정신보다는 타자로 대표되는 세계를 더 강조하고 ‘타자성(otherness)’을 근거로 삼는 자아 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대화’를 조망하기 때문에, 바흐친의 ‘대화’는 단순히 수동적인 참여자가 등장하는 회화(conversation)나 대화 참여자간의 말 교환(verbal exchange)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Vitanova, 2013b). 그래서 대화주의의 ‘대화’는 표현과 이해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의사소통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확장된 개념이 된다(정우향, 2013:287).
응답 가능성
바흐친(1984, 1986, 1990)의 ‘대화’는 발화자와 청자라는 서로 다른 주체가 공동으로, 동시에 참여하는 의사소통이며 서로의 발화에 대한 ‘응답 가능성(answerability)’의 실현을 그 특징으로 한다(Vitanova, 2013a:153). 한 번 말하고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응답이 무수히 오가는 공간인 ‘대화’는 화자와 청자가 서로에 대한 응답을 통해 각자가 타자로 변모되는, 즉 서로에 대하여 타자가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흐친은 ‘대화’를 단순한 의사소통 기능을 넘어선, 다시 말하자면 자아와 타자를 연결시키는 기능으로 인식한다. 바로 ‘나’와 ‘타자’의 긴밀한 연관인 ‘대화’를 통하여 주체는 세계를 한 방향이 아닌 양방향 혹은 여러 방향에서 볼 수 있고, ‘대화’를 통하여 능동적으로 세계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Dialogue here is not the threshold to action, it is the action itself. It is not a means for revealing, for bringing to the surface the already ready-made character of a person: no, in dialogue a person not only shows himself outwardly, but he becomes for the first time what he is. (Bakhtin, 1984:252)
가치가 개입된 언어
주목할 점은 ‘대화’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바흐친에게 언어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이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 분투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Bakhtin, 1981:333)을 나타낸다. 대화의 참여자들은 적극적으로 가치가 개입된, 이념정치적인(ideopolitical) ‘발화’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하면, 바흐친의 대화주의에서 언어는 중립적일 수가 없다. 언어는 이미 화자의 의도, 억양과 악센트, 사회적인 가치와 기대, 청자의 기대와 향후 예상되는 반응에 따라 재구성된 이념적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이수원, 2012). 대화 참여자들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여 발화 의미를 구성하고 공유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대화 상황을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참여하며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는데 동시에 ‘말의 장르(speech genre)’라는 언어 사용에 대한 사회적인 제약을 받으며 언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바흐친의 ‘대화’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인간들이 서로 만나고 서로 완성시키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인 ‘대화주의’에서 파생되는 인식적이고도 윤리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de Man, 1986).
또한, ‘대화’는 또한 말이 사용되는 ‘맥락(context)’이기도 하다. 언어의 본질은 항상 대화적이기에 언어의 의미는 언어 자체의 구조나 논리에서 찾을 수 없고,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인 대화 관계 안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다. 화자, 청자 그리고 대화 대상 간의 관계로 구성되는 대화의 맥락은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대화적 행위에서 맞이하는 특정한 대화 상황에 맞추기 위해 대화 참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언어를 선택하려는 대화 참여자의 적극적인 역할이 전제된다(이수원, 2012:260).
발화: 언어 연구의 기본 단위
바흐친은 언어의 대화적 본질상 언어 연구의 기본 단위는 개별 문장이나 구조가 아니라 ‘발화(utterance)’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발화는 “특정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반응”으로, 발화는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문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으며 각각의 발화는 의도성을 지닌다(Bakhtin, 1986:67). 발화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활동(speech activity)의 현실적인 단위이다. 따라서 발화는 의사소통 행위를 분석하는 최소의 분석 단위가 된다. 소쉬르가 추상화된 언어(langue)만을 유일한 연구 대상으로 삼고 문장을 연구의 기본 단위로 삼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바흐친은 화자에 대한 응답성과 의사소통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문장은 언어의 기본 단위가 될 수 없다고 간주하였다.
The sentence as a unit of language lacks the capability of determining the directly active responsive position of the speaker. (Bakhtin, 1986:82)
다시 말하면, 바흐친은 문장을 대화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제도적, 문화적, 개인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화, 즉 ‘맥락화된 언어 활동(contextualized speech activity)’을 통해서 대화가 구성 및 확대된다고 보았다(1986:73). 특히 발화의 대화적 특성과 관련하여 바흐친은 “모든 발화는 주어진 특정한 영역에서 언어 공동체의 연쇄에 대한 반응으로서 간주된다(1986:91)”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회적,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발화의 응답적이고도 대화적인 면모를 나타낸다. 발화가 항상 누군가를 향하여, 즉 ‘선행된 발화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지향성(addressivity)’은 발화의 중요한 특성이 된다. 지향성은 언어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언어 공동체의 연쇄(the chain of speech communion)”, 즉 선행된 발화를 통해 형성되어 왔음을 전제로 하는데, 즉 어떤 말을 할 때는 그 말에 목적성 및 방향성과 함께 언어 공동체에서 특정한 의미로 사용된 역사도 함께 담겨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과거의 의미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 계속 될 대화의 연속선상에 있으므로 어떤 발화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최종적으로 단정하여 못 박을 수 없다.
종결불가능성
대화가 응답과 재응답의 끊임없는 연쇄를 통해 의미가 구축되어가는 것이기에, 발화는 항상 이전 발화들에 대한 응답으로서 지속적으로 창조되고 형성된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바흐친은 발화의 ‘미완결성’ 또는 ‘종결불가능성’(unfinalizability)’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발화만으로는 의사소통이 홀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발화의 응답적인 지향성을 또한 강조한다(Bakhtin, 1986). 바흐친의 ‘종결불가능성’은 우리 삶에서 아직 결정적인 결말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비완결적 입장을 취하며 열린 가능성을 지향하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발화의 섣부른 결론적 단정을 거부하고 동시에 발화를 잠정적 해결책과 같은 결과물(predetermine outcomes)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흐친에게 완전한 종결은 오히려 사고의 사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White, 2014:224).
마지막으로, 바흐친은 발화를 “말의 정합성(coherence)과 체계성이 특정 상황에서 이루어진(situated) 행위와 접촉해서 투쟁하는 장소(a site of struggle)”로 보았다(Clark & Holquist, 1984:10). 그러므로 자아-타자, 내부-외부 세계가 충돌하는 영역, 즉 ‘경계(boundary)’에서 벌어지는 ‘대화’라는 역동적인 사건은 궁극적으로는 자아와 타자를 연결시키며 주체를 형성해 가며 개인의 총체적인 삶과 관련되는 “이데올로기적 되어가기(becoming an ideological process, Bakhtin, 1981:342)”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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