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아빠는 우리 네 가족이 한 달 정도 외국으로 배낭 여행을 갔으면 좋겠어. 그럼 유치원, 학교, 학원 다 빠져야 하는데 괜찮을까?”
“좋아요! 근데 친구들 못 만나는 건 조금 아쉬워요.”
두 딸도 여행에 찬성해서 한 달간 결석하기로 하였다. 갑작스럽게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를 믿어 준 우리 가족들이 정말 고마웠다. 비행기 표를 끊었다. 말레이시아 랑카위 IN - 싱가포르 OUT. 기간은 2018년 11월 13일부터 12월 13일까지. 이렇게 한 달 동안 말레이시아 북쪽에서 남쪽 끝인 싱가포르까지 우리 가족만의 배낭 여행이 시작되었다.
--- p.7
서로 고민을 하다가 네 가지의 주제로 규칙을 정하였다.
1. 안전 2. 배려 3. 배움 4. 사랑
네 주제에 대해 지켜야 할 세부적인 내용도 정리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곳에는 단 한순간도 있고 싶지 않았기에 나를 모르는 곳, 익명성이 보장된 곳으로 미련 없이 떠났다. 스케치북과 그림 도구를 쥔 채…. 이렇게 말레이시아의 랑카위→페낭→쿠알라룸푸르→말라카→조호르바루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어진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의 약 900km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 p.14
잠자리를 준비하고 아이들을 재운 후 맥주 한 잔이 생각났다. 근처 편의점을 찾으려고 밖으로 나섰다. 숙소에 실망하고 날씨에 좌절한 오늘이었다. 여행의 첫날부터 꼬인 것 같아 침울한 마음으로 문을 나섰다. 비는 이미 그쳐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밤 하늘은 무수히 빛나는 별들로 가득했다. 불과 한 시간 전 최악의 날씨가 언제였냐는 듯이 말이다. 이제야 주변이 내 눈에 하나둘씩 들어왔다. 주변의 식당과 가게는 현지인들의 활기로 가득찼다. 숙소 앞 체낭 해변,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바다 내음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달빛과 별빛에 비치는 바다의 몽환적인 색과 라이브 펍에서 들려오는 가수의 라이브 음악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상쾌한 기분으로 캔맥주를 마시면서 숙소로 향하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처음 도착했을 때의 폭우와 숙소의 실망감으로 인한 우울한 길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여행의 설렘이 담긴 길이었다.
--- p.32
“아빠, 못하겠어요. 무서워요.”
그때 시끄럽고 주변에 피해를 주었던 외국인 친구들이 다가와 우리 딸에게 “Don’t Worry~! Don’t Worry~~! It’s Fun!”하면서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물고기 주변으로 아이를 안고 가 주었다. 아이는 그 여행객에 몸을 의지하여 먹이를 주었다. 큰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해냈다는 뿌듯함이 보였다. 나는 우리 딸을 도와준 그들이 고마웠다. 시끄럽다고 화를 낸 내가 창피하고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시끄럽다고 느꼈던 사람들은 그 나라 언어 특성상 발음과 발성 자체가 컸던 것같다. 결국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시끄럽다고 화를 낸 것이고, 내 잣대로 상대방을 평가한 것이다. 나름 십여 년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타인의 문화와 삶을 존중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 잣대로 타인을 판단하는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인데 말이다.
--- p.56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켁록시’는 한자어로 ‘극락사’이다. ‘극락사’라는 글자를 읽고 중국계 이주민들이 처음으로 페낭으로 넘어왔을 때를 상상해 보았다. 자기 고향을 떠나 낯선 타국에 와서 그것도 육지가 아닌 황폐한 섬에 도착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맨손으로 자기 삶을 일궈내는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했을까?
치열함과 생존을 위해 버티는 그 처절한 삶 속에서 중국계 이주민들은 더욱 똘똘 뭉쳐 부처의 가르침으로 하루하루 버텨냈을 것이다. 현재의 고된 삶을 버텨 사후에 ‘극락’에서 함께 만나기를 소망했기에 그들의 정신과 철학이 켁록시 사원에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다. 초기 중국계 이주민들의 삶을 생각하니, 화려하고 웅장한 켁록시 사원의 겉모습보다 페낭에서 자리를 잡으며 버틴 간절한 소망이 느껴져 가슴이 벅차올랐다.
--- p.101
쿠알라룸푸르는 쇼핑하기 좋은 도시 중 하나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쇼핑의 시작과 끝은 부킷 빈땅(Bukit Bintang)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L 모노레일 부킷 빈땅 역에서 내리면 여러 전광판에 보이는 광고와 쇼핑백을 손에 든 사람들도 가득하다. 저렴한 로컬 브랜드부터 명품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쇼핑몰이 즐비해 있다. 우리나라도 따지면 동대문 시장과 명동, 강남을 한 곳에 모아놓은 곳 같다.
저렴한 가격대의 SPA 브랜드가 많아서 부담 없이 옷을 살 수 있다. 발품을 열심히 팔면 질 좋은 티셔츠나 바지를 몇 천 원에 살 수도 있다. 3,000원에 산 티셔츠를 5년이 지난 지금도 입고 있다. 저렴한 가격과 질 좋은 의류 매장이 많아 말레이시아에서 장기 여행을 할 경우 여벌 옷을 조금만 챙겨 짐을 줄이고 이곳에서 옷을 사 입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
--- p.127
“얘들아, 저게 반딧불이래.”
귓속말로 두 딸에게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반딧불이가 비추는 불빛에 취한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평온한 광경이었고, 이 모든 게 경이롭게 느껴졌다.?위대한 자연 속에서 우리는 정말 작은 존재고, 남들과 경쟁하며 아등바등 살아왔던 내 삶이 하찮게 느껴졌다. 결국 우리 가족이 가장 소중한데….
우리는 반딧불이가 내는 빛을 멍하니 바라볼 뿐 숨소리조차 잊은 듯 그들의 작은 공연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우리 가족이 모기에게 이곳저곳 물렸다는 것도 반딧불을 보고 나서 알았다. 배에서 내렸지만, 여전히 우리는 여름밤의 여운에 심취하고 있었다. 이런 추억을 우리 가족이 같이 공유할 수 있어서 자연에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두 딸과 처음으로 반딧불을 본 사람이 아빠라는 게 좋았다. 아이들이 커서 또 반딧불을 보면 ‘아빠’를 기억하겠지.
--- p.164
오랑우탄 하우스나 키엘 벽화뿐만 아니라 말라카에는 존커 거리를 중심으로 벽화 작품이 많다. 카페, 식당, 기념품점 등 곳곳에 벽화가 가득해 오히려 벽화가 없는 수수한 집이 눈에 띈다. 벽화를 감상하다 보면 거리 자체가 작은 미술관이 된다. 수백 년 된 건물에 그려진 벽화들은 보면 과거와 현재가 조화로운 말라카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벽화 마을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주제가 천차만별이라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드는 마을도 있다. 말라카처럼 하나의 주제 혹은 건물의 특징을 나타내는 작품처럼 마을을 나타내는 콘셉을 맞추어 벽화가 만들어지면 더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94
아이들을 위해 키즈카페에 간 거지만 다양한 외국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경험을 주고 싶었던 것이 나와 아내의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생김새도 모습도 다른 외국 아이와 서먹하던 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같이 손동작·발동작하면서 미끄럼틀도 타고 역할 놀이도 하면서 놀이한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진다. 그 순수함이 부럽다. 우리나라에서만 지내다 보면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적다. 그래서 외국을 나가면 현지인들이나 여행자 거리에 숙소를 잡는 편이고, 아이가 외국 사람들과 부딪칠 수 있도록 상황을 자주 만들려고 했다.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 p.228
다행히 세 여인께서 허락을 해주셔서 카야토스트 본점을 찾아 나선다. 본점? 본점이면 유명하다는 건대. 구글을 검색해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이다. 아침을 먹으러 집을 나선다. 하늘은 새파랗고 공기가 맑다. 차가 다니는데도 매연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싱가포르의 내음을 맡으며 10분 정도 걷다 보니 노란색 건물이 보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야쿤 카야토스트(Yakun Kaya Toast) 본점이다. 아침 7시인데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들어가 보니 외벽만 새롭게 칠했을 뿐 안은 낡은 테이블과 의자, 앤티크한 커피잔, 접시 등 물건 하나하나가 오랜 세월 동안 사람 때가 묻어 정겨움이 있었다.
--- p.257
성당 근처 공원에서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돗자리에 앉아 근처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사서 나누어 먹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고 떠드느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한다. 한편에서는 한 친구가 기타를 치면 같이 따라 부른다. 공터에서는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케이팝에 맞추어 춤을 춘다. 여자들끼리 소풍하러 온 무리는 한 친구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다. 연애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을 보며 아내와의 연애 시절을 떠올려 본다.
세인트 앤드류 성당(St. Andrew’s Catherdal)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유서 깊고 유명한 건축물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죽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결국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더해져야 가치 있게 되는 것이다.
--- p.273
센토사에 도착하면 커다란 멀라이언이 반긴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멀라이언 타워인데, 사자의 입과 머리 위에서 보는 센토사의 절경이 아름답다. 센토사에는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가 많다. 한마디로 놀이의 끝판왕을 보여 준다. 대표적으로 센토사 하면 유니버설 스튜디오다. 대부분의 싱가포르 여행자가 꼭 들리는 곳이다. 나도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싱가포르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기에 이곳에서 원없이 놀았다. 날씨가 한창 더울 때는 S.E.A 아쿠아리움으로 들어간다. 세계 최대의 아쿠아리움답게 수많은 해양 생물을 보다 보면 눈이 아플 지경이다. Ocean Dome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족관인데, 두 딸과 멍하니 물고기를 바라보는 동안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들게 한다.
--- p.297
우리는 귀국해서 한참 동안 여행에 대한 추억을 곱씹었다. 사진을 고르면서 얽혔던 기억을 되새기고 같이 웃고 울었다.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같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선물은 가족이었다. 아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길을 걷고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순간이 행복했다. 우리 두 딸과 매일 장난치고 우리만의 규칙을 정해 게임을 하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 길이 소중했다. 내가 사는 존재는 우리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우게 해 주었다.
나의 존재 이유를 외부에서 찾으려고 했던 지난날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우리 가족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그 삶이 내가 사는 이유이다. 이제는 직장에서의 삶보다 가정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 의식해서라도 퇴근하면 온전히 가족과 함께하려고 한다.
---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