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가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프랑스로 가게 되었다. 해외에 파견된 남편을 따라 프랑스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불어를 전혀 못 하는 아이에게 학교가 어떤 곳일지 상상되었지만, 그 또한 아이가 겪고 이겨내야 하는 문제다. 격려하고, 칭찬하고, 품고 안아주는 것이 내 할 일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아이의 자기 주도성이 더욱 도드라졌다.
프랑스의 초등학교는 교문 앞에서부터 철저히 엄마가 들어갈 수 없다(유치원은 교실 앞까지 엄마가 함께할 수 있다). 첫날에는 급식을 먹지 못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며칠이 지나, 건너서 들었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아이가,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고 한국인 지인이 급식실에 데려가 겨우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팠지만, 어쨌든 해결했고 먹었으니 됐다. 학교는 아이가 다니는 곳이다. 아이에게 말했다. “먹었으면 된 거지, 뭐. 이제는 급식실 잘 찾아가.” 당황했을 마음이 염려되면서도 씩씩하게 이겨내고 해결한 마음이 기특했다. (…)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그냥 키워진 것이 아니었다. 뷔페에서 우리 부부가 음식을 뜨러 자리를 이동해도 아이들은 얌전히 앉아 식사했다. 둘째가 돌 때였다. 유튜브, 장난감, 휴대전화나 태블릿PC도 없이 말이다. 아이 주도 이유식으로 식사 예절이 잘 잡혀 있는 아이들 덕분에 어느 식당에서나, 어느 여행지에서나 편안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그렇다.
---pp.65~67 「스스로 먹게 내버려두세요」 중에서
공부도 좀 진득하게 했으면 좋겠다. 딱 30분만 앉아서 해줬으면 싶다. 아이들은 10분 하고 “다했다.”, 20분 하고 “다했어요. 언제까지 해야 해요?”라고 묻는다. 엄마는 속이 터진다. 다른 잔소리는 못 줄이지만,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잔소리를 줄여줄 물건이 있다. 바로 타이머다. 째깍째깍 초침으로 아이들을 긴장시키는 타이머가 아니다. ‘구글 타이머’라는 것이 있다. 30분을 맞추면 30분만큼 빨간색 면적이 점점 줄어들면서 시간이 되었을 때 알람이 울린다.
학교에서도 이 타이머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아이들은 수업 시간 40분을 넘겨 수업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한다. 타이머로 40분을 딱 맞춰두면 아이들이 군말 없이 수업 시간에 집중한다. 아 침 시간에 책을 읽자고 했다. 몇 분이면 부담 없이 책을 읽겠냐 물었더니, 10분은 너무 짧고 30분은 너무 길어 20분이 적당한 것 같다고 하기에, 타이머를 20분으로 맞춰두고 “시작!” 한마디를 외친다. 아이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책을 읽는다. 20분 정도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20분 동안은 누구도 딴짓하지 않고 책을 읽는데 신기하다. (…)
아이들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은 매우 어렵고 추상적이다. 놀 때는 1시간이 10분 같고, 공부할 때는 10분이 1시간 같다. 눈으로 시간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시간 개념을 몸으로 익히고, 그것을 스스로 조절하여 실행으로 옮긴다. 엄마가 잔소리하는 이유는 엄마만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자. 감으로는 느낄 수 없는 시간을 눈으로 보여주자. 스스로 보게 하면 잔소리도 줄어들고, 시간을 조절하는 힘도 자란다.
---pp.84~86 「‘이것’ 하나면 잔소리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중에서
4~7세에 자기 주도성을 잘 만들어주지 못했다 해도 저학년 시기를 잘 이용하면 아이들은 금방 익힌다. 1학년 아이들은 1학기가 다르고 2학기가 다르다. 2학년과 3학년이 되면 천지 차이라 할 만큼 아이들이 달라진다. 1학기에는 바닥에 드러누워 교실을 기어 다니던 아이가, 매일 친구들과 싸움을 일으켜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이르러 왔던 아이가 2학기가 되면 다른 아이가 된다. 공부가 재미없다던 아이가 “저 공부 좀 잘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게 된다.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이제 막 입학을 앞둔 아이의 엄마이거나 저학년 엄마라면 지금부터는 작전을 바꾸어야 한다. 늦어도 1시 전후로 끝나는 학교생활을 잘 이용해야 한다. 집에서 아이가 충분히 생각하고, 배움을 깨우치고, 신체를 많이 움직일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 시간을 재 문제집을 풀게 하거나, 학원에 가서 단기간에 성적이 오르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는 안 된다. 저학년은 성적을 확인하는 학년이 아니다. 중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준비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야 한다. (…) 6년 동안 아이가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비로소 자신만의 공부법을 만들게 된다. 선생님들은 안다.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도 공부로 오래가지 못할 아이와 받아쓰기 0점을 받아도 공부로 오래갈 아이가 눈에 보인다
---pp.142~143 「8-10세 초등 공부가 중고등 실력으로 이어지는 자발적 방관육아」 발문 중에서
아이에게 자기 주도성을 심어주는 일은 어쩌면 엄마가 아이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아이를 마음에서 놓는 연습을 하는 과정은 아닐까? 나라고 왜 아이 곁에 서서, 아이가 하는 모든 것을 도와주고 싶지 않을까? 그렇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내 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지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태도’다. 자기 주도성이란 학교에 와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오기 전에 가정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자기 주도성이 있어야 학교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다. (…)
이름을 쓸 줄 모른 채 입학하는 아이가 있다. 한 아이는 학년 내내 모르는가 하면 한 아이는 ‘아, 이름을 써야 하는구나. 집에 가서 이름을 알아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엄마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준 아이, 즉 자기 주도성이 없는 아이다. 엄마가 이름 쓰기를 알려 주지 않으면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후자는 자기 주도성이 있는 아이다. 지금 학교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아이이므로, 이름 쓰기를 시작으로 스스로 필요해서 배우고자 노력한다. 자기 이름 석 자를 모르고 학교에 와도 공부를 잘하게 되는 아이다.
“얘는 내가 안 해주면 아무것도 못 해. 내가 다 챙겨줘야 해.”
엄마가 곁에서 챙겨주고 싶은 욕심에 둘러대는 핑계가 아닌지 생각해보자. 해주기 때문에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결핍이 있어야 채우려 한다. 고3 때까지 학원을 찾아주며 공부시킬 것 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방관하는 엄마가 되어 자기 주도성을 키워줄 것인지, 그리하여 공부할 거리를 스스로 찾아오는 아이로 만들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pp.144~146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겨주지 마세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