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나 역사가 아니라 거리의 아침을, 골목의 저녁을 상상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거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 표정들 아래 자리한, 어떤 한 기관이 일괄 조율할 수 없는 복잡한 욕망의 부글거림도. 그런 사실을 깨달을수록 그 골목과 거리를 모두 포괄하는 깔끔한 이념은 그만큼 더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 p.15
현수동은 낙원은 아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고,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며, 병에 걸린다. 법을 슬쩍, 혹은 대담하게 어기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동은 풍경이 아름답고, 선량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이 사는, 사랑스러운 동네다. 그런 동네의 골목과 거리는 어떤 풍경일까. 그곳 사람들은 어디로 출근하고 생활용품을 어떻게 살까. 어떤 길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저녁을 먹고 나면 어디에 갈까. 주말에는 뭘 할까. 아이들은 어디에서 놀까. 일하고 쇼핑하고 식사하고 수다를 떨 때 현수동 주민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 pp.16~17
현수동의 길을 걷다 보면 ‘이곳은 무척 오래되었구나,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흔적이 쌓여 있구나’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뒤라는 시간을 의식하고, 자신이 그 일부라고 여기게 된다. 거리와 골목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자기 존재가 깊은 뿌리, 또 먼 미래와 이어져 있음을 믿게 된다. 현수동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존중하고 대화한다.
--- pp.23~24
광흥창 터는 와우근린공원이 시작되는 곳인데, 이곳에는 와우시민아파트 19개 동이 있었다. 1970년 4월 8일 새벽 한 동이 무너졌고, 34명이 사망했다.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무면허 건설업자가 철근 70개가 들어가야 하는 콘크리트 기둥에 5개만 썼을 정도로 황당하게 지었다(이후 199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붕괴 사고들이 반복된다). 그러나 와우근린공원에는 이 사고를 추모하는 조형물이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없다. 적어도 내가 광흥창역 일대에 살았던 2014년까지는 그랬다.?
--- p.47
밤섬은 그 모든 것의 상징이고, 우리는 자연의 힘을, 우리 안에 있는 파괴적인 욕망과 우리가 소유하게 된 기술을, 인간의 강함을, 인간의 약함을, 사람들의 고통을,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시간이 해내는 일들을, 아이러니와 불가사의를, 복잡하고 연약하고 중요한 연결들을, 세계의 질서와 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무섭게 여겨야 한다는 게 내 대답이다.
--- p.88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어떻게 일하는지 보지 못하며 자란다(나는 어린아이들이 부모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예절을 익히고 가족애가 깊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일과 삶의 공간이 멀어지고, 각각의 공간이 규정한 목적에 맞춰 행동하는 동안 일과 삶의 의미는 양쪽 모두 협소해진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이웃은 층간소음이나 일으키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로 전락한다.
--- p.98
그래, 나 또 거창해졌다. 아직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사막 한가운데 높이 5백 미터, 길이 170킬로미터인 직선 도시를 세우겠다는 빈 살만이나 화성에 백만 명이 거주하는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일론 머스크보다 내가 더 황당한 소리를 하는 걸까.
--- p.104
현수동 상권은 아마존과 쿠팡, 밀키트, 에어프라이어의 시대에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꿈이다. 그곳 상인들이 뭘 어떻게 팔기에 인스타그램 인증 숏 명소가 되지 않고도 총알 배송에 맞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현수동이 뭘 해도 장사가 잘되는 지역이라면 유통 대기업들은 왜 그곳 땅을 사들여 지점이나 가맹점을 내지 않는단 말인가? 건물주들이 왜 상점을 쫓아내지 않는단 말인가?
--- p.116
요즘은 이사를 가면, 아니 이사를 가기도 전에 먼저 앞으로 살게 될 동네에 도서관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웬만한 책은 전자책으로 읽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자주 다닌다. 공공도서관은 점점 책을 대출해주는 시설 이상이 되어가고 있다. 서강도서관을 예로 들자면 사서들이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주민들이 참여하는 바자회와 낭독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 pp.131~132
『아무튼, 현수동』 원고를 붙들고 있는 동안 광흥창역 일대와 현수동에 대해 하고픈 말이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많아서 놀랐다. 그리고 약간이나마 나 자신을 다시 보게 되어 놀라기도 했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사랑하고 또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사는 마을만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인류애 없이 자기가 사는 마을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분명히 광흥창역 일대를 사랑했다.
---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