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우리 세련되게 멋진 엑스 피앙세들이었는데.” “넌 그랬니?” “당신도 그랬어요. 찬찬히 생각해 봐요, 처음부터.” 아니, 난 아니었다. “난 아니야.” “확실해요?” “응.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은 했지.” “그런데요.” “내가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는 게 빠르지. 그건 안 되는 일이라고 그랬는데. 잘 안 됐어.” 더 이상 정연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내 얼굴도 보지 않는다. “실수했다고, 원래 그런 놈이니까 웃고 말자고. 그럴까 했는데, 나 그거 아니야.”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나 보다. 손끝까지 저리다. “어떤 마음이었어요?” 한참을 침묵하던 정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를 보지는 않고 묻는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지난 열흘 동안 정말 머리가 터져 버릴 정도로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바람피우다 돌아온 전남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관계도 아닌 거고. 그게 애매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 근데 내 마음은 애매하지 않아. 난 너랑 남자 여자로 만나고 싶어. 어른들도 안 끼고, 옛날에 너랑 하려고 했던 약혼 같은 거 다 날려 버리고, 그냥 원점에서. 그러고 싶어.” 이제 식어 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을 보면서 나는 그녀가 침묵을 깨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생각이 많은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늘 공부를 해요.” “어쩌라고?” 생뚱맞긴. 공부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경영학 공부, 영어 공부, 일어 공부. 그런 거 아니에요. 딴 공부를 더 해요.” “안 지겹냐? 또 뭘 배우는데?” “울지 않는 법, 빚쟁이들한테 머리채를 잡혀도 고개 세우고 일어나는 공부,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 공부. 그런 거요.” “쓸데없는 거에 기운 쓰네.” “제일 열심히 하는 건요. 상처 입지 않는 방법, 또 피가 철철 나도 안 아픈 척하는 방법이에요. 그리고 사람이나 미래에 기대하지 않는 거. 어떡하면 그렇게 살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요즘 나는 자꾸 공부한 걸 까먹어요.” “너도 늙나 보지.” “나한테 그러지 마요. 날 흔들지 마요. 나 생각보다 맹해서 진짠 줄 알고 착각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나한테 그러지 마요. 장난이 아니란 확신이 정말 있어요? 스치는 바람 같은 감정일 수도 있는데.” 나 역시 그런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날 당구장 가서 돈 벌어 오라고 생글거리는 정연이에게 숨 막히게 키스를 하고 나는 정말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나는 내 마음에 확신이 있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몇 살인 줄 아니? 서른일곱이야. 근 20년 동안 여자 사고 많이 쳤어.” “자랑이십니다.” “그러니까. 나름 프로라고. 그런데 내가 똥오줌도 구별 못하고 너한테 이럴 거 같니?” “아니겠죠?” “그래, 아니야. 나도 망신살이 뭔 줄 알고 염치가 뭔 줄 안다고. 나는 여기서 이대로 너한테 차이면 뻘 짓 한 번 한 거라고 그렇게 넘어갈 수 없어, 내 마음이. 그리고…….” 말이 막힌다. “그리고 또 뭐가 있나요?” “바닥을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너도, 나도, 모두가. 그래도 괜찮다면 나는 처음처럼 그렇게 시작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