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잡고 여행을 하다 보니, 천재 작곡가들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들만은 아니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사는 이웃으로 느껴졌다. 친숙한 이웃으로서 그들의 음악을 다시 바라보자, 공감의 폭은 더욱 커졌다.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이토록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존경하는 작곡가들이 경탄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랑스러운 존재로 다가왔다.
--- p.5
입구에 들어서니 바로 눈앞에 소담스런 정원이 반긴다. 정원으로 가는 유리문에는 재미있는 기록이 적혀 있다. 당시 하이든이 런던에서 들여와 키운 앵무새가 그를 ‘파파 하이든’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파파’라고 불렀으면 그랬을까.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하이든이기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호칭이다.
--- pp.23~24
그라벤의 활기, 슈테판 대성당의 웅장함, 오페라 〈후궁 탈출〉의 패기 넘치는 에너지, 이 세 가지를 같이 떠올려 보니 당시 모차르트가 자신만만한 작곡가로서, 사랑이 충만한 젊은이로서 얼마나 신나게 이 작품에 몰입했을지가 여실히 느껴진다.
--- p.55
박물관을 나와 베토벤이 매일 걸었다는 숲의 산책로로 향했다. 박물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우선 그가 종종 들렀다는 마이어 암 파르플라츠라는 선술집이 나온다. 빈에서는 이런 선술집을 호이리게라고 부르는데, 직접 빚은 와인과 고기, 소시지, 감자 같은 간단한 음식을 판다. 여기에서 다시 왼편으로 꺾인 길의 이름이 바로 ‘에로이카가세’이다.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의 집에서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작곡한 곡이 바로 교향곡 제3번 〈에로이카(영웅)〉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 pp.85~86
〈멀리 있는 연인에게〉에 담긴 베토벤의 마음을 가슴 깊이 느끼고 싶었다. 그에게 치유의 의미가 있는 ‘빈 숲’의 칼렌베르크 언덕에 올랐다. 멀리는 빈 시내의 정경이, 가까이엔 포도밭의 향기로움이 함께하는 곳이다. 이 언덕에서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들으며 따라 읊조렸다. 오랜 시간 익숙하던 베토벤의 웅장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사랑하는 연인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간곡한 심정이 첫 소절부터 덤덤히 흐른다.
--- p.101
이곳에는 특히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꾸린 작은 음악 동호회 ‘슈베르티아데’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진한 우정이 드러나는 서신들과 그들과 함께 음악회를 열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마음에 와서 박힌다. 친구들이 함께 뭉쳐 즉흥 연주를 하거나 신곡을 선보이기도 하면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예술을 향유하는 음악 그룹, 내가 슈베르트와 그의 친구들을 가장 이상적인 예술가들로 생각하는 이유다.
--- p.121
브람스는 뮈르추슐라크에서 〈4번 교향곡〉 같은 대작을 완성하는 동안에도 지인들과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예민한 창작자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브람스가 오십 대였는데도 동네 아이들과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그는 늘 사탕과 은전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아이들에게 나눠줘 인기를 끌었다.
--- p.165
카페 돔마이어에서는 음식과 커피를 주문하고 느긋하게 신문을 읽으며 하루의 한때를 보내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상의 여유를 즐기는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나도 멜랑주 한 잔과 달콤한 케이크를 주문했다. 카페의 벽에는 슈트라우스 2세가 활동한 당시의 포스터와 그림들이 가득해서, 그 시절을 상상해보는 것도 꿀맛이다.
--- p.206
볼프는 자신의 가곡을 ‘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시’라고 표현했을 만큼 시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시기마다 시인 한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고르되, 다양한 내용의 시를 선택해 각각의 시적 개성이 온전히 살아나게 작곡했다. 그의 노래는 마치 시를 낭송하는 듯한 언어적인 리듬감을 가지며, 급격하게 음계를 이동해 독특한 선율을 만들어낸다.
--- p.231
드디어 가스트하우스에서 말러가 지내던 오두막의 열쇠를 건네받았다. 오두막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가스트하우스의 뒷문을 통해 호수 쪽으로 걸어가야 했다. ‘작곡 오두막’이라고 씌어 있는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곧 오두막과 아터제가 한눈에 들어왔다. 말러의 진짜 삶에 마침내 발을 들인 것 같은 특별한 감동이 밀려들었다.
--- p.255
원뿔형의 뾰족한 첨탑이 솟아 있어서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 집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작은 성 같았다. 이 아름다운 집은 쇤베르크가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살면서 그 유명한 12음기법을 탄생시킨 곳이다. 수백 년간 작곡을 위한 기본 틀은 ‘조성’이었다. 그런데 그 체계를 무너뜨리고 음계라는 틀이 사라지자 새로운 작곡의 기틀을 마련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개발된 시스템이 12음기법이다.
--- pp.306~307
십여 년에 걸쳐 빈을 방문하는 동안 나는 2백 년의 시간을 오가며 그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너무나 존경하는 이들이었기에 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게 느껴졌지만, 여행이 거듭될수록 점점 그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이웃처럼 친근해졌다. 그들이 태어난 곳, 처음 연주회를 열었던 곳, 여름휴가를 떠난 별장, 막 결혼해서 살았던 집, 작곡에 몰두하던 오두막, 그리고 영면에 든 이곳까지……. 그들이 남긴 음악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삶의 열정과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와 환희를 피부로 느끼면서 내 마음속에는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