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하기-되기 Doing-Becoming Families
기본적 정의
가족을 실체적 개념으로 귀착시키는 가족이데올로기를 넘어 혈연과 비혈연 관계를 포함한 다양한 가족적 관계를 동사적 의미로 이해하기 위한 용어로, 가족을 구성하는 의식적 실천과 신체적 · 정동적으로 서로에게 투과되고 스며드는 무의식적 소통의 계열들이 불연속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개념의 기원과 발전
이 개념은 20세기 후반 가족사회학자 모건(David Morgan)이 대안적 가족연구를 위해 제시한 ‘가족실천(family practices)’을 재맥락화한 것이다. 서양에서 가족이라는 말은 살림살이와 생계활동을 같이 하는 오이코스(oikos, 집 또는 가정)에서 유래했다. 희랍어인 오이코스는 이코노미(economy, 경제)와 똑같은 어원을 갖는 말로서, 자급자족의 공동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경제공동체라는 의미를 강하게 띤다. 패밀리(Family)의 어원인 파물루스(Famulus)는 희랍어 오이코스를 로마어로 번역한 말인데, 그 뜻이 노예, 노예와 여자를 포함한 재산소유물이다. 이처럼 가족은 지금 우리가 가족에 대해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사랑이나 정서적 유대에 기초한 공동체가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동양사회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유교문화권에서 가족은 집이라는 의미의 가(家)에서 연원하는데, 가(家)는 ?(집 면)자와 豕(돼지 시)자가 결합한 문자이다. 이는 집안의 귀중한 재산이었던 돼지의 우리를 반지하에 두고, 그 위에 사람이 사는 중국 가옥의 형태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가족은 함께 생활하고 일하며 생명을 보존하는 거주의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운명공동체의 의미를 함축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가족은 부부와 자녀의 사랑에 바탕을 둔 핵가족이다. 이는 서양에서 17세기 이후 개념화된 근대가족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경제, 규범, 교육 등의 기능이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적 차원(자본주의, 법, 학교 등)으로 분화되면서, 근대가족은 성과 사랑을 중심에 정서적 기능에 초점을 두게 된다. 즉 전통사회에서 경제적 살림공동체였던 가족이 근대사회에서 정서적 친밀공동체로 이행된 것이다.
근대가족은 부부와 자녀의 구성을 정상적인 형태로 간주하고, 정서적 태도와 친밀감으로 결속되어 평생 변치 않고 지속되는 것을 이상적 규범으로 삼는다. 하지만 가족의 이런 정상성과 규범성은 특정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조건 아래에서, 즉 공/사 영역의 이분법적 구분과 성별노동, 계층별로 구조화된 경제구도, 부르주아적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구성된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후기 근대에 이르러 근대가족의 정상성과 규범성은 근본적인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서구사회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20세기 중반 무렵부터 정상가족 해체 담론이 시작되었다. 당시 서구사회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독신가구 및 이혼이 급격히 증가했다. 또한 한부모 · 재혼 가정, 동성애 커플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출현하면서 더 이상 근대적 가족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 현상들이 출현했다. 기존에 익숙했던 가족의 표상으로는 친밀한 관계성과 그 관계에서 느끼는 실제 생활감정을 더 이상 적절하게 묘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가족의 변화를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틀이 모색되었다. 그 가운데 모건은 가족실천이라는 개념으로 가족을 하나의 고정된 자질이나 속성이 아니라, 사람 간 상호작용이나 가변적인 역동성 속에서 구축된 자질로서 재규정함으로써 전통가족과 신가족을 연결하는 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가족을 실천으로 봄으로써, 가족을 하나의 본질로 환원시키지 않고, 저마다 친밀한 관계의 맥락에 따라 상이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해당 당사자가 무엇을 가족으로 간주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족행위를 실천하느냐에 따라 가족의 형태와 역할도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핀치(Janet Finch)는 모건의 가족실천 개념을 가족시연(displaying families)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핀치에 따르면 가족은 실행되어야(done) 할 뿐 아니라, 시연되어야(displayed) 한다. 이는 가족실천이 유효하게 작동하려면 다른 가족구성원, 친구, 가족 이외의 제3자, 사회복지 담당자, 국가 등 유의미한 타자에 의해 인지되고 인정받는 사회적 퍼포먼스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즉 가족은 가족구성원들이 배우처럼 가족됨을 연기하고 타자가 관중처럼 그것을 가족적이라고 받아들이는지 여부에 따라 성립한다는 것이다. 가족실천과 가족시연은 산업화 이후 정상가족 모델로 간주된 (혼인과 혈연으로 결합한) 핵가족의 고정된 틀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법론을 제공해준다. 이런 접근법은 영국 경험주의 사회학을 중심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가족에 대한 구체적 경험 조사를 기반으로 가족현실의 다층적 의미와 복합적 양상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개인주의 문화를 바탕으로 고안된 가족하기 개념을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사용하기에 난점이 있다. 서구사회처럼 개인주의 문화가 제도화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주체적 선택과 실천의 문제로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가족은 정(精)이나 측은지심처럼 언어화하기 어려운 신체적, 정동적 감응과 유대의 관계성으로 특징지어지며, 민주적 의사소통 이전의 관습과 문화의 차원에서 좌우되는 측면이 강하다. 한국 가족의 이런 특성은 서구사회에서 발전한 가족하기 개념으로 온전히 설명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서 제시하는 ‘가족하기-되기’는 주체적 개인의 수행성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가족수행성의 복합적 성격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개념쌍이라 할 수 있다.
의미와 해석
가족하기와 되기의 변증법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가족은 단일한 의미망으로 포착되지 않고 하나의 형태로 통일되지도 않는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