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것이 현실로부터 달아나는 유일한 방법인 줄 알고 시작했다. 대단한 오해였던 것 같다. 글은 달아나는 나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와 앉혔다. 어느 날은 내 발로 순순히 따라오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개처럼 끌려오기도 했다.
다른 곳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여기, 이 보잘것없는 세계가 나의 것이니 이제는 이 황무지를 내 것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손에 곡괭이 한 자루를 들고 아침을 기다린다. 도주에 실패한 나는 이제 밭을 갈 것이다. 꽃밭이 될지, 채소밭이 될지, 영원히 황무지로 남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저 갈아야 한다.
--- p.11
말을 아끼니 실수가 적어졌다. 피로한 일이 줄었고, 대신 사람도 줄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나는 이것이 편한 것 같다. 다만 가끔 너를 생각한다. 열정적으로 너의 삶에 끼어들고자 했던 나를 생각한다. 그럴 때면 삶에 커다란 무언가가 이미 끝나 버린 느낌이다. 내가 잃었던 밤처럼 혹시 나는 너를 그렇게 잃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 날, 내게 찾아오는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절망이다.
나는 내가 잃은 것들에 절망한다.
--- p.22
엄마가 울음을 삼키는 법을 배웠던 날, 나는 외로움의 언어를 배웠다. 외로움은 말이 아니라 가늘고 긴 숨으로, 꽉 막힌 목으로, 안착할 곳 없는 눈빛으로 전달되었다. 외로움에는 소리가 없고, 소리가 없어 외롭다.
--- p.32
반복되는 노래만큼 길고 지루한 여름 한 철을 그와 보내며 나는 그런지를, 펑크를, 얼터너티브 록을, 커트 코베인을 배웠다. 마약이 없이 취했고, 권총 없이 자살하던 밤들이었다.
--- p.48
그렇게 늙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을 잃고, 젊음 그 자체를 잃겠지. 가슴이 있었던 자리에 상처만 남듯, 도려 나간 젊음 역시 포유류의 입 같은 우둔한 흔적만 남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반듯하게 누워서도 가슴이 아팠다. 한쪽 가슴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 것처럼 찌릿한 통증이 찾아왔다. 가슴과 젊음을 잃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 두렵다.
--- p.62
록키는 울었다 멈췄다 다시 울기를 반복했다. 규칙이나 박자라는 것이 없는 음치 같은 울음소리에도 잠은 쏟아졌다. 저것이 된장이 싫어 저리 우는 것이라고, 내일은 몰래 곶감이라도 훔쳐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은행의 고린내가 채 가시지 않았음을 까맣게 잊고, 곶감의 하얀 가루를 지문마다 묻힐 계획에 신이 나서 서둘러 눈을 감았다. 빨리 자야 빨리 아침이 오지. 매일 자라는 록키가 좋아서, 그것이 매일 늙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내가 재촉한 시간에 모두가 저무는 동안, 순진한 바보처럼 서둘러 아침을 불렀다. 그러니 어쩌면 나의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참을성 없이 발을 구르며 불렀던 모든 날들이 나 때문에 쏜살같이 흘러가 버렸다.
--- p.102
나는 행복에 집착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더 악착스러웠던 것 같다. 빵 냄새가 행복이라면 매일 먹지도 않을 빵을 10개도 넘게 살 수 있었고, 사랑이 행복이라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구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언젠가 그가 말했던 ‘힘 있는 놈이 잘 사는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힘이 없어서 실패했다던’ 그의 결론을 통째로 부정할 수 있는 기회였다.
--- p.114
그런 것일까? 단 한 번이라도 반짝이는 기억이 있다면, 그것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행운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p.133
한철인 모든 것들을 경계한다.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 남은 고독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라야 내 것 같다. 웃긴 일이다. 나는 늘 떠났고 나의 모든 이들은 남겨졌는데, 정작 나는 내가 없는 자리를 글에 담길 원했다. 그러니 내가 말한 남겨짐과 고독과 외로움은 모두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철 다녀간 내가 잊히는 게 두려워서 허구를 적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p.141
그런 기술을 배우고 싶다. 사람의 말과 불행의 말을 구분하는 법, 사람의 마음과 불행의 마음을 알아보는 법, 그것을 안다면 예의 없이 손을 내미는 불행에게 완벽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행한 사람을 구하러 갔다가 불행에 빠져 죽지 않고 사람만을 건져오는 법,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이 절실하다.
--- p.159
“당신은 슬픕니까?”
얀이가 떠나고 수년이 지난 지금, 얀이는 없고 얀이의 물음만 남았다. 늦은 밤, 불을 끈 방에서 화면 속 깜빡이는 커서를 볼 때, 해가 지고 또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오늘 내가 놓친 것들을 생각할 때, 문이 잠긴 공원 너머 혼자 켜진 가로등을 볼 때,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하고 그래도 여전히 허전한 무언가가 속을 파고들 때, 얀이는 없고 얀이의 문장만이 나를 찾아와 말을 건다.
당신은 슬픕니다, 라고.
--- p.193
나는 제이와 버드가 살기 바란다. ‘잘’까지는 아니어도 무조건 살기 바란다. 삶의 명제인 ‘살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왜’냐고 묻지 말고,
‘어떻게’도 생각하지 말고,
살아내길, 산다는 것, 그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여름을 기다린다.
--- p.206
파리는 축제여야 파리다. 거리에서 음악이 흐르고, 카페에서는 언제나 잔이 넘치고, 지하철역 귀퉁이에서 오줌을 싸는 노숙자를 비웃는 젊은이들과 그 젊은이들을 호통치는 유대인 할머니 그리고 유난히 점잖은 신사와 엉덩이의 반을 내놓은 힙합바지를 입은 흑인 청년, 한 줄기의 빛을 향해 절을 하는 무슬림 신자와 사진을 찍는 아시아인, 그 모든 이들이 뒤죽박죽 섞여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는 파리를, 나는 영원히 축제로 기억할 것이다.
--- p.219
나의 꿈은 버려진 신발 한 짝과 굴러가지 않는 자전거를 지키는 박물관이 되는 것. 벅적벅적하던 사람들이 다 떠난 곳에 혼자 남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라고 말하는 이의 기억을 보관하는 저장소가 되는 것. 억새 풀밭처럼 빽빽하게 자란 시간 사이로 길을 내어 되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모과처럼 물고 오고 싶은, 신발 한 짝과 멈춘 자전거를 닮은 누군가의 슬픔이 있다. 내게는 그런 것이 있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