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열정적이고 지루하며, 언제 소나기가 내릴지 알 수 없는 시기다. 20대는 늘 이마에 땀이 맺혀 있고 삶이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연령이다. 따라서 20대는 여름이다. 반면에 30대는 인생의 봄이다. 어떤 날은 공기가 너무 따사롭고 또 어떤 날은 지나치게 춥다. 언제나 불안정하고 자극적이다. 끓어오르는 수액이 잎을 무성하게 만들고 모든 꽃의 향기를 구별할 수 있는 나이이다. 30대는 지저귀는 새소리만으로도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처음으로 향수와 추억을 구별하는 시기이다.
---「33쪽 ‘열정적인 인생의 여름, 봄 그리고 가을’」중에서
자연이 인간에게 제시한 저 이중적인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아버지의 살해자이며, 어머니의 남편으로서 성스러운 질서를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혜라는 것은 자연에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노라. 자신의 지혜로 자연의 법칙을 파멸시킨 자의 운명은 자신이 이룩한 세계마저 파멸시킬 수밖에 없노라. 오이디푸스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지혜의 칼끝은 지혜로운 자에게 향한다. 인간의 지혜는 자연에 대한 범죄이다.”
---「72~73쪽 ‘지혜란 자연에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다’」중에서
철학자인 그는 자신의 사상에 의해 밖으로 내던져진 뒤, 위에서 또는 아래에서 습격당하듯이 얻어맞는다. 그는 스스로 천둥을 잉태하고 있는 폭풍이다. 그를 둘러싸고 세계는 항상 무엇인가 포효하고, 신음하고, 균열하고, 좋지 않은 낌새를 풍긴다. 그것이 그의 숙명처럼 낙인찍힌다. 철학자 그는 자신으로부터 도주하고 늘 자신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하지만 그의 격렬한 호기심이 그를 재차 ‘자기’로 회귀하게 만든다.
---「92쪽 ‘그는 스스로 천둥을 잉태하고 있는 폭풍이다’」중에서
가끔은 이곳에도 음악이 흐른다. 옛 가락을 기억하는 한 노인이 오르간을 연주하면 아이들은 제멋대로 춤을 추며 원을 그린다. 이 모습을 본 나그네의 마음이 착잡해진다. 너무나 황량하고, 너무나 닫혀 있고, 너무나 퇴색했고, 아무리 찾아봐도 희망이 없다. 어느새 저녁 안개가 밀려오면 나그네는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을 자책한다. 나그네의 발걸음이 삐걱거린다. 눈에 보이는 것은 황막하고 잔인한 산등성이뿐이다.
---「122쪽 ‘가끔은 이곳에도 음악이 흐른다’」중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빠르게 반응하고, 운명에 반항하고, 미래에 도전하는 습성을 타고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위대한 자기 실험의 희생양이 된 인간, 최후의 지배를 찾아 동물·자연·신들과 전투를 벌이는 인간,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인간,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소유한 인간, 영원한 미래를 꿈꾸는 인간, 자신의 투지 때문에 안식을 찾지 못하고 그로 인해 현재의 육체를 파멸로 이끄는 인간, 이 용감하고 풍요로운 동물은 자신의 용기와 풍요로움 때문에 지상의 동물 중 가장 무거운 머리와 괴로운 심장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166쪽 ‘인간은 한마디로 고뇌하는 동물이다’」중에서
육체를 경멸하는 인간들에게 경멸은 존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경과 경멸, 가치와 의지를 창조한 자는 누구인가? 창조자는 자신을 위해 존경과 경멸을 창조했고, 쾌락과 고통을 창조했다. 육체는 자신의 의지를 붙들기 위해 정신을 창조했다. 육체를 경멸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리석은 경멸로써 자신에게 봉사하고 있다. 그대들은 죽음을 원하는 것이다. 그대들은 결코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은 그대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이것은 그대들이 갈망하던 전부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대들의 자아는 몰락을 원한다.
---「204쪽 ‘그대들은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할 수 없다’」중에서
공포는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근본적인 감정이다. 원죄와 도덕도 오직 공포를 통해서만이 설명될 수 있다. 즉 공포에서 지식이 태어난 것이다. 맹수에 대한 공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들을 육성시켰다. 인간은 맹수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연구했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길들이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처럼 공포는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지배했고, 마침내 정신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미화되기 시작했다. 인간이 공포의 감정마저 길들여 버린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길들인 공포를 과학이라고 불렀다.
---「231쪽 ‘인간은 공포를 길들여 지식을 탄생시켰다’」중에서
사람들은 소득을 위해 일한다. 이것은 모든 문명국들의 구성원이 선택하는 당연한 논리다. 그들에게 일은 하나의 수단일 뿐 결코 목적은 아니다. 따라서 일을 통한 소득의 정도가 일을 선택하는 첫 번째 조건이 된다. 그런데 소득의 정도보다 일의 즐거움을 더 먼저 따지는 희한한 인간이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일을 가리고 쉽게 만족할 줄 모르는 종족이다. 그들에겐 일이 목적이고 일의 만족이 소득의 정도가 된다. 만약 아무리 소득이 많더라도 일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278쪽 ‘일의 과정을 즐기는 인간을 예술가라 한다’」중에서
돌이켜 생각해 봐도 나는 바그너의 음악 없이는 내 청년 시절을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독일인이 되도록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삼나무에서 뽑은 마취제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나는 바그너가 필요했다. 바그너는 모든 독일적인 것에 대한 뛰어난 해독제인 것이다. 해독도 독이다. 나는 독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328쪽 ‘바그너의 혁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