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위고는 ‘지금, 여기’의 로망티시트였다. 감성 우월주의와 창조적 자아, 상상력의 보디가드, 천재 예찬, 역사관과 정의로운 신앙관, 민족과 민중에 대한 열혈적 애정, 낭만적 아이러니…. 바로 이런 문학적 사고를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불완전한 현실보다는 ‘검증된’ 역사의 시공에서, 그리고 내면으로부터의 따뜻하고 강렬한 사랑을 내세웠다.
--- p.37
하느님을 믿었지만 평생 교회에 가지 않았고 교회 사제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던 빅토르 위고, 그에게도 단 한 사람,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 미리엘 주교가 있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세상의 벼랑에 선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자 애썼다. 『레미제라블』은 그런 작품이다.
--- p.50
“나는 『레미제라블』을 현세대가 아닌 후세를 위해 썼다.”
--- p.58
콰지모도가 가슴속으로만 사랑하는 에스메랄다 앞에서, “제 불행은 제가 아직도 인간과 너무 닮았다는 것입니다. 전 차라리 짐승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외칠 때, 하잘것없는 존재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고통은 차라리 숭고함이었다. 콰지모도, 그는 민중이었다. 그리고 비참함, 그것은 민중의 숙명이었다. 적어도 위고의 시대에는 말이다.
--- p.68
위고는 과연 사랑을 위하여 글을 쓴 작가였다. 무한한 연민의 작가였다. 위고는 세상의 모든 낮은 이들과 낮은 것들에 천착했다. 민중 작가 빅토르 위고, 그의 사전에서는, 위대함이 높음과 부유함 그리고 찬란함과는 결코 동의어가 아니었다.
--- p.70
왜 순수한 존재들이 죽어야 하고, 불의가 승리하며, 민중은 비참함 속에 빠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와 깊은 회의는 망명지의 위고를 지배하고 있던 정신적 갈등이었다. … 『관조』는 한 영혼의 회상록이다. 요람의 새벽에 시작하여 무덤의 여명에서 끝나는 삶 자체이다. 젊음, 사랑, 일, 투쟁, 고통, 꿈, 희망을 가로질러 이 빛에서 저 빛으로 진행하고 무한의 가장자리에서 미친 듯 날뛰며 멈추는 에스프리이다.
--- p.74~75
자유를 향한 위고의 문학적 시도와 그에 맞서는 세력들 간의 전쟁은 생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 자유를 지키려는 망명. 그는 추방이나 다름없는 망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궁창의 행복도 행복이오. 나는 그런 것이 부럽지 않고, 이런 행복, 망명 생활이 좋소. 녹록치는 않지만 그래도 자유롭소.”
--- p.88
“나는 인류가 걸어가는 길 위에 있는 돌이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길이다. 사람은 삶의 주인도 죽음의 주인도 아니다. 사람은 자유를 증가시키면서 동료 시민들에게 인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불굴의 믿음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뿐이다.”
--- p.93
막스 갈로는 저서 『빅토르 위고』에서 위고의 일생을 관통하는 은밀한 성적 행동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문학사에길이 남는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위고의 사적 자취를 생경하면서도 의심스런 눈빛으로 보게 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 p.113
위고에게 사랑과 일은 서로 다르지 않다.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 일 해야 했고, 일하기 위해 사랑해야 했다. 일이 있어야 사랑했고, 사랑이 있어야 일 할 수 있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것이 위고의 소명이라고 여겼고, 그것이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의 존재 방식이었다.
--- p.159
“하느님은 숨고 사람은 찾는 존재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을 찾는 자로 하여금 마침내 찾아내기를 원한다. 위고의 신앙은 하느님, ‘그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
--- pp.196~197
팩션 『빅토르 위고』를 쓴 막스 갈로는 시대의 한 ‘영웅’의 빛과 그림자를 똑같이 보고자 한 작가였다. 인류를 선도한 위인 역시 ‘소심하고 기이해 보이는’ 삶의 구석이 있었음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낭만주의 문학은 확실히 우리들의 가슴에 솟아오르는 불꽃을 제공한다.
--- p.201
잠자는 이여 일어나라
나를 따르는 이, 나를 선두로 보내는 이
천사 같은, 그 이름 자유이니
---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