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나 자신이 초라해질 때, 남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내 사회적 가면을 치장하는 일이 참으로 고될 때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나,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스스로를 지켜주는 또 하나의 나가 필요하다. 나보다 훨씬 지혜롭고 강인한 또 하나의 나가 길을 잃고 휘청이는 내 손을 붙들어 준다.
--- p.15
그리고 내게는 이 문장이 던지는 화두가 ‘문학은 왜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아름다운 대답처럼 들린다. 우리 안에 1000개의 가능성이 있다면 수많은 사람이 그중에 10개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 나머지 990개의 가능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십중팔구 미처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라져 버리지 않겠는가. 우리는 환경이 어렵다는 이유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 안에 숨 쉬고 있는 1000개의 가능성을 하루하루 버리며 살아간다. 문학은 그 ‘나머지’의 소중함, 990개의 아름다운 꿈을 일깨운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사라져 가는 모든 잠재적 가능성이 곧 우리 자신임을 문학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갈 권리’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바로 문학이 아닐까.
--- p.18
1인분의 삶에 갇힐 위험에 빠진 비좁은 삶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더 커다란 나, 더 깊고 복잡한 나, 마침내 ‘나’를 뛰어넘어 또 다른 타인들과 접속하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갈 무한한 가능성이 문학 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문학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그곳에 아름다운 문학의 놀이터를 만들어, 누구나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덧칠하고,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문학이란 이름의 거대한 공동체적 벽화를 그리고 싶다. 문학이 아직 너무 멀고, 거창하고, 심오하고, 다가가기 힘든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당신에게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웃으면서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 p.22
상실의 빈자리를 다독이는 일은 결코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아니다.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분명 더 크고 깊은 존재로 성장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우리는 더욱 알록달록한 세상의 차이들을 품어 안는 존재가 된다. 문학을 통해 나는 잃어버린 사랑과 사람과 세계를 되찾는다.
--- p.26
문학은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바로 지금 여기로 끊임없이 생생하게 불러오는 힘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제주 4·3을, 1980년 광주를, 세월호를 문학의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그날의 아픔을 또렷이 기억하는 한 책임자들은 영원히 그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할 것이며, 떠난 이들은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끝내 보듬고 부둥켜안고자 하는 그 모든상처 입은 자들의 마지막 보루다. 문학은 우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시간 속으로 초대하여 이야기의 반딧불로, 은유와 상징의 횃불로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한다.
--- p.30
작품 초입에서 냉담하고 무미건조하게만 보이던 맷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적인 주인공이 되어간다. 맷은 트라우마를 겪은 이후 오히려 전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한다.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을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파국의 순간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때가 있다. 열심히 돈을 벌고 자기 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의 역할이라고 믿었던 맷은 일에 빠져 사느라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는지 알게 된다.
--- p.44
그를 파괴한 것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에 대한 사랑이지만, 그를 지켜준 것은 끝내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고통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한 인간의 존엄을 지켜냈다. 오이디푸스는 위대한 인간의 추락을 그린 이야기가 아니다. 추락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기 삶을 지켜낸 자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다. 나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내 부모가 저지른 죄마저 끌어안은 한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다.
--- p.55
때로는 상처 입은 순간의 아픔보다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더욱 괴롭힌다. 상처보다 더 아픈 치유의 과정이 우리 무릎을 꺾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도 문학은, 마침내아름다운 타인의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이야기의 모닥불로 얼어붙은 심장을 데우는 모든 순간 이야기는 당신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필 것이다. 상처에 결코 무너지지 않은 주인공들, 그리하여 상처마저 매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포근한 응원의 손을 내민다. 그 손들의 따스함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 pp.64~65
어릴 적에는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으며 도대체 이 아이가 무슨 사고를 치려나 싶어 불안했다. 내 코가 석 자임에도 이 친구가 커서 뭐가 되려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니 홀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홀든은 나였다. 내가 무엇이 되든, 아무것도 되지 않든 그저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홀든과 나에게 절실했던 것은, 가르침을 주는 거창한 조언이 아니라 그저 따스한 안부의 메시지였다.
--- p.72
문학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내가 스스로를 학대하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도 믿지 못할 때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속삭였다. 너의 불안과 너의 절망과 너의 증오조차 사랑한다고. 우리의 그 어처구니없음과 울퉁불퉁함과 대책 없음이 세상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임을 문학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 p.76
삶에 대한 설렘을 회복하는 것, 세상에 대한 놀라움을 되찾는 것, 이 모든 것을 느끼는 감수성의 심장을 되찾는 것. 그것이 문학을 통해 우리가 쟁취할 수 있는 생의 기쁨이다.
--- pp.91~92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내 안에서 속삭이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가엾은 친구야, 왜 그토록 무서운 방법으로 세상을 버리려 하니. 나는 그 목소리가 지상을 떠나고 싶어 하는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신화, 이야기, 즉 문학이 내게 선물한 것은 끝내 다시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용기였기에. 그렇게 문학은 내 심장을 두드린다. 다시 일어서라고. 다시 사랑하라고. 다시 모든 장애물과 싸워 이기라고.
--- p.103
모든 절망과 권태의 시간 속에서 읽기와 쓰기는 나를 굳건히 지켜주었다. 세상의 폭풍우에 지지 않고 당신만의 작은 사유와 창조의 공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은 결코 당신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 p.127
나는 오늘도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읽는다. 위험을 피해 안정을 얻기 위한 마음의 기술이 아니라 위험을 온몸으로 겪어내고도 내 영혼이 파괴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위험을 다 감내하고도 삶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는 힘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 p.194
깊은 우울은 더 깊고 쓰라린 다른 우울의 힘으로 치유될 때가 있다. 그리하여 문학은 나보다 더 아프게 앓고 있는 타인의 슬픔 속으로 여행하는 일이다. 앉은자리에서 세상 모든 이의 슬픔 속을 여행하는 기적이, 문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
--- p.222
내가 견뎌야 할 일상이 절대 끝나지 않는 기나긴 터널처럼 느껴질 때. 나는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읽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나를 발견한다.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시간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된다. 읽고 쓰고 쓰고 또 읽음으로써 우리는 매번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믿음이 나를 떠민다. 지금 내게 다가오는 고통을 저번보다는 더 낫게 견뎌내는 사람, 첫 번째 화살에는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 pp.252~253
우리가 미처 위로하지 못한 모든 슬픔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아무도 쓰다듬어 주지 못한 그 모든 상처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은 단지 피해자에 그치지 않고 ‘한사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 귀환해야 합니다. 저는 비로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눈부신 비상을 믿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미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미치지 않은 척하면서 이 무시무시한 하루를 버티었겠지요. 내일도 답장을 보내지 않을 당신에게 내가 문학을 통해 수혈받은 모든 사랑과 희망의 언어들을 담뿍 담아 오늘도 변함없이 편지를 씁니다.
--- p.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