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
▶ 유명해진 이후에도 남성적인 필명을 고집한 19세기 영국의 여성 작가 : ▷ 조지 엘리엇은 작가로써 작품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편집장과 번역가로써 여러 작품을 번역하고, 교정하고, 출판하며 ‘글밥’을 먹어온 인물입니다. 당연히 당대 영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출판사, 작가, 번역가 등과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만큼 그녀의 작품은 결코 ‘개인 메리 앤 에번스의 작품’이기 이전에 ‘편집장 메리 앤 에번스’이자 ‘번역가 메리 앤 에번스’의 작품으로 ‘함께 묶여’ 평가받는 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 조지 엘리엇은 여성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 1856)이란 평론을 통해 당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평론가이기도 합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사회학자 해리엇 마티노(Harriet Martineau, 1802~1876),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 1816~1855), 엘리자베스 개스켈(Elizabeth Cleghorn Gaskell, 1810~1865) 등 당대의 저명인사를 실명으로 거론할 정도였죠. ▷ 따라서 조지 엘리엇의 입장에서 당대의 작가와 작품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의 편집장으로써 자신의 실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즉 작가이기 이전에 번역가이자 평론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커리어와 ‘작가 조지 엘리엇’을 분리하기 위해서 필명을 내세운 것이죠.
▶ 웨스트민스터 리뷰(The Westminster Review)의 실질적인 편집자 : ▷ 1850년 영국으로 돌아온 조지 엘리엇은 런던으로 이주한 후 출판업자 존 챔프먼(John Chapman, 1821~1894)의 집에 머무르면서 본격적으로 편집자이자 번역가,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존 챔프먼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문제작 다비드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 1808~1874)의 예수의 삶(Das Leben Jesu, The Life of Jesus, 1846)을 번역한 조지 엘리엇의 원고를 선뜻 출간해 준 바 있습니다. ▷ 조지 엘리엇은 이후에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 1841)과 같은 ‘종교적 문제작’을 번역하였는데, 이런 측면에서 그녀를 전통적인 의미의 독실한 신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후 영국작가에게 최고의 영예가 될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 안치되지 못했죠. ▷ 존 챔프먼(John Chapman, 1821~1894)은 웨스트민스터 리뷰(The Westminster Review)를 막 구매한 상황이였고, 덕분에 조지 엘리엇은 런던에 상경하자마자 1851년부터 1854년까지 잡지의 실질적인 편집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기고자 중 하나인 조지 헨리 루이스와 만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 유부남과 24년간 동거한 후 61세의 나이로 21세 연하남과 결혼한 스캔들 메이커?! : ▷ 조지 헨리 루이스(George Henry Lewes, 1817~1878)는 웨스트민스터 리뷰(Westminster Review)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기고가였으며, 자연스럽게 조지 엘리엇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그네스 저비스(Agnes Jervis, 1822~1902)와 결혼하였고, 세 자녀를 함께 낳았으나 아내가 또 다른 남자와 네 아들을 낳는 등 족보가 복잡한 상황이였습니다. 조지 엘리엇은 그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였고, 1854년부터 아내가 부재한 그와 동거하였습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함께하였으나, 조지 헨리 루이스와 공식적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법적인 아내’는 아닙니다. ▷ 비록 그와 법적으로 혼인하지 않았으나, 혼인 기간 중 메리 앤 에반스 루이스(Mary Ann Evans Lewes)라고 서명한 사례가 여럿 있을 정도로 루이스와 ‘실질적인 혼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지 엘리엇이란 이름부터 조지 헨리 루이스(George Henry Lewes, 1817~1878)에서 따온 것이죠. ▷ 조지 엘리엇은 조지 헨리 루이스가 사망한 후 오랫동안 알고 지낸 존 월터 크로스(John Cross, 1840~1924)와 결혼식(1880년 5월 16일)을 치렀습니다. 그녀가 61세의 늦은 나이에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결혼한 것은 루이스와의 동거가 짧지 않았기 때문이였습니다. ▷ 이후 부부는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만, 이후 조지 엘리엇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결혼식을 치룬 해 크리스마스를 3일 앞둔 12월 22일 영국 런던에서 사망하였습니다. ▷ 남편 존 월터 크로스(John Walter Cross, 1840~1924)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조지 엘리엇과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친구였고 은행가(Banker)로써 이재에 밝았다고 합니다. 아내의 사후에는, 그녀가 주고받은 편지와 미발표 원고 등을 모아 조지 엘리엇의 편지와 저널로 읽는 조지 엘리엇의 삶 3부작 1860(George Eliot's Life, as Related in Her Letters and Journals. by George Eliot)을 출간함으로써 ‘작가 조지 엘리엇’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문학 편집자로써 영국, 아니 영미 문학계에 기여하였습니다.
▶ 조지 엘리엇 작품 속 여주인공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 조지 엘리엇이 모든 작품을 새드엔딩으로 장식한 것은 아닙니다만(리사가 왕을 사랑한 방법 1869), 적지 않은 작품에서 매력적이고 똑똑하기까지 한 여주인공을 교도소 수감(아담비드 1859), 홍수로 인한 익사(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1860), 내연녀와 자식까지 있는 남자와의 결혼(다니엘 데론다 1876) 등 악운을 넘어선 불행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을 즐기는 작가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신데렐라 콤플렉스에 대한 작가의 담대한 도전이자 여성작가들의 어리석은 소설들(Silly Novels by Lady Novelists, 1856)에 대한 풍자인 동시에 영미 문학계의 다양성을 채워준 소중한 자산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의 서구문학정전(The Western Canon)(1994) 15위 : ▷ 미국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 1930~2019)은 1994년 출간한 서구문학의 정전(The Western Canon, 1994)을 통해 13세기 활동한 이탈리아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부터 20세기의 아일랜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까지 26명의 작가와 주요 작품을 소개하였습니다. ▷ 서구문학의 정전(The Western Canon, 1994)은 26명의 작가를 선정해 시대 순으로 배열하였으나, 16세기의 영국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예외적으로 1번으로 등장합니다.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은 영국 작가로써는 8번째이자 26명의 작가 중 15번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여성작가로 한정한다면,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과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에 이은 3번째 작가입니다.
▶ 조지 엘리엇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하이게이트 묘지에 안장된 이유는?! : 조지 엘리엇은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으로부터 인정받은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부인해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 아닌 런던 북부의 하이게이트 묘지(Highgate Cemetery) 동쪽 묘지(East Cemetery)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 또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사랑한 조지 헨리 루이스의 곁에 묻히는 것을 원했을 것 같네요. ▷ 그녀의 사망 100주년(1980)을 기념해 기념비가 추가로 설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