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저는 북극곰 출판사로부터 특별한 부탁을 이메일로 받았습니다. 북극곰에서 엠마누엘레 베르토시라는 이탈리아 작가의 그림책을 출간할 예정인데 그 책이 원래 이탈리아 북부 사투리와 표준어 두 가지로 쓰여진 책이니 저더러 강원도 사투리를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북극곰이 보내온 엠마뉴엘레 베르토시의 그림 몇 장을 보았습니다. 베르토시의 색감은 마치 자연이 도화지 속으로 번진 듯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모든 캐릭터들은 베르토시만의 스타일로 생명의 숭고함과 풍부함을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캐릭터와 배경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독특한 구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제 북극곰이 보내온 우리말 원고를 읽어보았습니다. 제목은 [눈 오는 날]이었고 이야기는 젖소 아줌마와 당나귀 아저씨의 대화로 시작되었습니다.
젖소와 당나귀가 사는 마구간에 눈과 추위를 피해 여러 동물들이 찾아옵니다. 젖소와 당나귀는 어느 동물도 가리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마을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만삭의 아줌마와 아저씨가 마구간을 찾아옵니다. 동물들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안으로 맞이하고 자신들의 온기로 녹여줍니다. 그날 밤 아줌마는 무사히 아기를 낳고 마구간 위로 별 하나가 떠오릅니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자연과 동물이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라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실은 자연이 늘 사람을 살리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흔쾌히 북극곰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베르토시의 이야기를 강원도 사투리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눈 오는 날]을 강원도 사투리로 옮기면서 저는 가본 적도 없는 베르토시의 고향을 본 것만 같았습니다. 겨울이면 많은 눈이 내리는 대관령과 그 아래에 있는, 제 고향 위촌리도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베르토시가 왜 굳이 고향의 언어로 그림책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 그곳의 말을 처음으로 배웁니다. 처음으로 배운 언어에는 오감과 자연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 그 다음에 배운 언어들과의 엄청난 차이점일 것입니다.
외국어로 대화할 때와 모국어로 대화할 때 소통의 자유와 깊이가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투리를 최초의 언어로 배운 사람들은 사투리로 대화하는 것과 표준어로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인간을 넘어 자연과 소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투리는 특별히 아름답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산골에서 자란 베르토시가 자기 고향 말로 작품을 쓰고 그렸습니다. 그리고 베르토시의 작품을 대한민국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제가 제 고향 말로 옮겼습니다. 베르토시가 이탈리아에서 받은 감탄과 찬사를 한국에서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동화가 된 천재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그림책 [누구세요?]는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얼마나 개구쟁이이며 얼마나 천재적인 작가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우선 제가 베르토시를 개구쟁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린 아이 같은 호기심과 유희 본능으로 이 작품을 만드는 베르토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베르토시를 천재라고 부르는 까닭은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창작한 결과들을 모아서 이렇게 놀라운 그림책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세요?]가 만들어진 과정을 상상해 봅니다. 베르토시는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 지방 우디네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베르토시는 길에서, 산에서, 그리고 쓰레기장에서 버려진 삽, 펜치, 톱, 망치, 못, 나사, 그물, 흙받이, 자물쇠, 양동이, 파이프, 손톱깎이, 돌 등을 줍습니다. 그리고 주워온 고물들을 보니 어린 시절에 읽은 동화 속 주인공들이 떠오릅니다. 베르토시는 동화 속 주인공들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합니다. 물고기, 해적선, 새, 증기선, 풍차, 돈키호테, 산초, 나무, 늑대, 양, 로봇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동화 속 주인공들을 만들고 보니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베르토시는 주인공들의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대사를 써서 새로운 동화책 [누구세요?]를 만들게 됩니다.
저는 제 친구 베르토시가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베르토시가 개구쟁이라서가 아닙니다. 베르토시가 천재 작가여서가 아닙니다. 제친구 베르토시가 자랑스러운 이유는 어른이 된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어린이의 마음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르토시가 여전히 동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이 작품 [누구세요?]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 베르토시는 분명 이솝 우화와 안데르센의 동화를 들었으며, 자라면서 [보물섬]과 [돈키호테] 같은 책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화들을 잊지 않았던 베르토시는 여러 고물을 모으면서 동화 속 주인공들을 작품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새로운 동화를 완성했습니다. 그림책 [누구세요?]를 만든 과정은 바로 동심을 잊지 않고 살아온 동화작가가 스스로 하나의 동화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림책 [누구세요?]는 어린이의 마음이 어떻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지를 보여줍니다. 동화 속 이야기가 어떻게 인간의 창의성에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어린이가 어떻게 한 사람의 예술가로 성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호기심과 놀이와 발명과 예술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동심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어린이들에게 그림책 [누구세요?]는 무한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줄 것입니다. 어떤 어린이들은 스스로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어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이 장난감이 없던 시절의 장난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에게 그림책 [누구세요?]는 동심을 되찾아주는 작품입니다. 그림책 [누구세요?]는 어른들에게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동화 속 주인공들을 다시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곧 호기심이 발동하고 상상력이 넘치며 창의력을 발휘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어른들이 동심을 되찾게 되면 이 세상은 정말 멋지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겁니다. 동심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루리 (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