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는 사물에 본질적 의미가 있다는 유물론이나 위대한 인간이 세상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휴머니즘과 다릅니다. ‘의미는 구조에서 만들어진다’는 구조주의 원리를 잘 이해하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으로 생각한 정체성이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언어경관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학자들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본질이 없다고 단언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나다움’이 어떤 것인지 의식하고 있죠. 다만 ‘나다움’이란 것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언어/기호의 구조로 덮여 있어요. 구조주의의 기본 원리에 대해 알게 되면 세상을 둘러싼 나다움의 언어와 기호는 낯설고도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 p.11
우리는 랑그에 따라서 허락된 언어사용의 가능성을 수행할 뿐입니다. 인간주체란 고작 말을 나르는 자, 언어체계의 수행자, 혹은 랑그의 대행자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태어났고, 구조를 통해 자랐고, 구조의 질서로 교육받았죠. 그런 이유로 랑그의 코드에 따를 때만 우리는 적절한 의사소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소쉬르의 구조주의는 인간을 언어사용의 창조적 주체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말의 조합 또는 ‘언어놀이’를 할 수 있는 창조성이 있다고 하지만 구조를 쉽게 바꿀 순 없죠. 인간의 주체성을 놓고 보면 구조주의는 그렇게 휴머니즘과 단절됩니다.
--- p.44
서로 다르면서도 존귀한 삶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라면 다수는 통합체적이고 환유적인 의미구조에 종속됩니다. 집단주의,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계열체적 ‘선택’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접성이 강조된 의례를 연결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그렇지만 인접성의 의미구조는 인생의 모범답안이 될 수 없습니다.
--- p.65
기호에 관한 의미작용을 제대로 숙지했다면 주변의 문화구성물을 직접 한번 분석해보세요. 새롭게 유행하는 옷차림, 각종 디자인, 음식, 건축물, 여가활동, 여행상품, 정치활동, 영어열풍 등 무엇이든 기호적 코드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기호로 직조되어 있고, 기호로 구성하고 분해될 수 있는 모든 건 구조화된 범주체계일 것입니다.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결과물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법의 질서로 인간의 언어사용을 이해하듯이 문화구성물의 의미 생성과 작용방식 역시 코드화된 기호범주로 분석될 수 있습니다.
--- p.145
우리는 직관적으로 의미를 소비합니다. 예를 들면, 상품 광고를 보면서 도상 기호인 어떤 이미지가 유도하는 함축적 의미를 객관적인 수준의 지시적 의미로 동일화합니다. 미디어를 가득 채운 의미덩어리는 함축을 늘 전제하고 있지만 의미작용에 관한 문식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새롭게 기획하거나 기존의 의미체계에 대해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언어와 같은 자의적 기호체계에 관해서는 그나마 기호표현과 기호내용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반면에 대중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만들어진 과장된 의미체계를 명민하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지시의미와 함축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 비판적 언어감수성 교육, 혹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 p.170
의미덩어리를 바르트식 의미구조로 분석하려면, 2단계에서 부각되는 개념이 어떤 기표와 연결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해외여행 콘텐츠로 제작한 예능 방송이 많은데, 외국 음식과 대비적으로 배치된 ‘얼큰한 라면과 김치’가 자주 등장합니다. “한국 사람은 역시 라면하고 김치야”라며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라면과 김치는 그저 라면과 김치일 뿐이죠. 그러나 2단계 의미작용에서 라면과 김치는 텅 빈 기표로 기능하고 ‘애국심’이란 개념과 연결됩니다.
--- p.209
좌/우를 위치성만 놓고 보면 좌측 기호에는 기존 가치를, 우측 기호에는 신규 가치를 부여합니다. 기존 가치는 이미 사회적으로 약속된 것이고 다수 사회구성원이 상식처럼 수용하는 것입니다. 반면 신규 가치는 기호 생산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로, 혹은 새로운 정보나 쟁점으로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영상물에서도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새롭고 놀라운 무언가나 누군가를 제시합니다. 제품의 소비자나 정보의 수용자는 좌측의 정보가치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숙지하는 동시에 우측의 신규 가치는 새로운 (그래서 특별한) 이데올로기로 수용하게 됩니다.
--- p.257
기득권력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 늘 사용하던 언어/기호의 재현적 질서를 그대로 두고 싶겠죠. 반면 그것에 대항하거나 대안을 찾는 또 다른 권력집단이라면 익숙한 언어/기호의 코드를 탈신화화할 것입니다. 언어/기호가 선택되고 배치되는 경관이나 관례만 잘 관찰해도 담론경쟁, 이데올로기 투쟁, 혹은 사회변화를 기획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언어감수성 교육, 비판적 미디어 교육, 시민성과 민주주의 교육에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 pp.278~279
나는 여러분이 보편주의와 상대주의를 모두 경계하면서 의미와 기호에 관한 비판적 감수성을 키웠으면 합니다. 그런 동시에 기존의 보편과 본질의 질서를 비판하고 재구성할 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언어/기호로 구성되고 사회적 관행으로 조정된 인간성의 가변적 요인을 수용하면서 한편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알 수 없는 인간다움의 본성을 상수로 두는 겸손함을 갖는 것이죠. 그렇다면 본질은 없는 것이 아니고 너무 복잡해서 우리 모두 정확하게 모르는 편에 가깝습니다. 혹은 너무 위험한 질서를 만들 수 있어서 우리가 함께 질문하고 비판하고 다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