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집에 안 갈 거야.”
그러자 제이슨이 더욱 야단스럽게 굴었다. “너 지금 피 나잖아. 상처 부위를 물로 씻어 내고 소독약 발라야 해. 하다못해 반창고라도 붙여야 한다고.”
“소독약이니 반창고니 그런 거 우리 집에 없어. 다 썼을 거야.” 마커스와 단둘이 집에 있는 건 죽기보다 싫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둘러댔다.
“그래? 그럼, 어디 갈 데라도 있어?” 그 순간, 마침 딱 한 곳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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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지상 출입구에 도착하려면 아직 9미터는 더 가야 하는데도 제이슨의 시끌벅적한 함성이 들려왔다. 이 녀석의 목소리는 마치 공연장에 설치된 커다란 스피커를 타고 나오는 것 같다. 나 원 참, 이런 녀석들이 나더러는 요새의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으니! 나는 툴툴대며 사다리를 타고 바닥에 내려서서는 녀석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무 부주의한 것 아냐? 너희들 목소리가 인공위성에까지 들릴 지경이라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반과 제이슨은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지르며 소파 위에서 방방 뛰고 있었고, 씨제이와 미첼은 뒷짐을 진 상태로 배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꿈틀꿈틀 기고 있었다.
--- p.69
씨제이와 제이슨과 미첼이 옆 골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한 손에 트럼프 카드를 펼쳐 잡듯 지폐를 쥐고 얼굴에 부채질했더니 녀석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리 다섯의 마음은 모두 같은 곳, 바로 요새 주방의 서랍에 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씨제이가 기쁨에 겨워 외쳤다. “베넷 회장이 싸구려 물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서랍 안에 든 걸 모두 처분하면 람보르기니 슈퍼카를 사고도 남겠는걸!”
“그 돈이면 케이넌을 벗어나지 않는 가까운 곳에 우리 아빠의 거처를 마련해 줄 수도 있겠다!” 제이슨도 말을 보탰다. 은밀하게 조용히 나누어야 할 얘기이건만 녀석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p.85
“너희 다섯 얼간이, 대체 숲에서 뭣들 하는 거냐?” 루크가 물었다.
“숲이라고?”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
“허튼소리 집어치워!” 루크가 사납게 받아쳤다. “너희가 눈에 띌 때마다 지켜봤는데, 언제나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숲에서 걸어 나왔어. 아니면 숲길 초입에서 서성이며 서로를 기다리기 일쑤였고. 대체 숲속에 무슨 대단한 걸 숨겨 놨기에 다섯 녀석이 늘 거기에 붙어사는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루크와 예이거가 틈만 나면 토마토색 자동차를 몰고 동네 여기저기를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우리가 숲속에 여러 차례 들락날락했다는 걸 봤다는 말은 괜히 떠보는 소리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 p.110
이 상처를 친구 녀석들에게 설명하려면 또 한 번 창의적인 이유를 생각해 내야 한다. 새로 산 자전거 헬멧을 썼더라면 다칠 리 없는 부위였기에, 헬멧 쓰는 걸 왜 깜빡했는지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도 필요했다. 집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엄마와 새아빠가 서로 손을 잡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엄마는 경기장 주차장에서 있었던 일을 그새 까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내 얼굴의 찢어진 상처와 붓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엄마, 정말로 잊은 건 아니죠? 그동안 숱하게 겪었던 일이잖아요. 앞으로도 숱하게 겪어야 할 일이고요.
--- p.132
미첼은 휴대폰을 고칠 형편이 안 돼서 4개월이나 액정이 깨진 휴대폰을 들고 다녀야 했던 딱한 녀석이다. 게다가 엄마는 녀석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만큼 일에 치여 산다. 고로 미첼의 엄마는 선물을 받아 마땅하다! 미첼에겐 엄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미첼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미첼은 나의 친구이니까. 리키가 반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다른 녀석들의 허락을 구하지 않기로 했다. 난 요새에 혼자 있을 때를 틈타 주방 서랍 안에서 가장 작은 포크 하나를 집어 들고, 은 세척제로 거무스름한 변색 부위를 깨끗이 닦아 낸 다음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 p.166
“녀석들 중 한 명이야!”
루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얼음처럼 굳어 있던 정지 자세를 풀고 앞뒤 가릴 것 없이 맹렬한 속도로 어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크와 예이거는 나보다 다리가 길었지만, 난 분명 저들보다 이 숲길에 더 익숙했다. 불빛이 점차 희미해지고 초점이 분산되는 것으로 봐서 내가 놈들을 따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나조차도 내가 어디로 내빼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루크와 예이거가 멀찌감치 뒤처지면서 그들이 내뱉는 욕설과 위협하는 소리도 차츰 희미하게 들렸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에서 놈들을 따돌렸음을 자축하려던 순간이었다. 달리던 속도를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나뭇가지에 가슴을 강타당한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 p.231